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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ks Jan 17. 2019

다른 데 가고 싶으면 적어도 두배는 더 빨리 달려야 해

붉은 여왕의 가설

  “여기서는 같은 장소에 있으려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뛰어야만 하지. 만약 다른 곳에 가고 싶으면 적어도 두 배는 더 빨리 달려야 하고!”     

  이 문장은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속편,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문장이다. 주인공 앨리스는 붉은 여왕과 한참 달렸지만 늘 제자리였다. 그러자 붉은 여왕이 앨리스에게 한 말이다.     

루이스 캐럴

  생물이 진화해도 경쟁 대상이 더 빠른 속도로 변화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뒤처지게 되는 것을 일컫는 ‘붉은 여왕의 가설(Red Queen’s Hypothesis)’이 여기서 나왔다.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 소설에서 말하는 ‘붉은 여왕의 나라’와 비슷한 거 같다. 쉼 없이 노력해도 늘 제자리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요즘 세상에서 생존 경쟁은 숨 막히는 전쟁과 같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거 같다.

달리고 있는 붉은 여왕과 앨리스를 표현한 존 테니얼(John Tenniel)의 삽화

  최선을 다하지만 언제나 늘 그 자리다. 남들보다 앞서가려면 두 배는 더 노력해야 한다. 남보다 잠을 덜 자고,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그래도 나아지는 건 별로 없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나마 남보다 더 노력해서 내가 나아지면 다행인데, 누군가는 아무런 노력도 없이 부모의 도움으로 아니면 거짓을 이용해서 남보다 앞선다. 그럴 때면 박탈감과 허탈함 그리고 좌절을 느낀다.

  국정농단 사건이 터졌을 때 이런 문제도 함께 터졌다. 학교에 다니며 죽어라 공부하는 학생은 제 자리 걸음인데 부모덕에 그리고 양심을 저버린 어른들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좌절감을 느끼고 허탈해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4당 5락’이란 말이 있었다. 4시간 자며 공부하면 대학에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말이다. 그만큼 남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 대학에 갈 수 있다는 말이다. 참 힘든 시절이었다. 하지만 나의 딸들을 보면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힘들었던 건 힘든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아이들은 공부만 해서는 안 된다. 동아리 활동도 해야 하고, 봉사활동도 해야 하고 온갖 것을 다 해야 한다. 대학에 가야 남보다 앞선다는 생각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렇게 해야 한다. 대학에 가지 않아도 인생을 잘 살 수 있다는 말은 하늘에 대고 외치는 아우성에 불과하다. 요즘 텔레비전에 ‘SKY캐슬’이란 드라마를 보면 참 할 말이 없다.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을 마음껏 뛰어놀고 이것저것 해보아야 할 나이에 교실에 앉아 공부만 하고, 학교가 끝나고 나면 모두 학원으로 간다. 이게 정상인가 싶다. 고등학교만 그런 게 아니라 요즘엔 초등학교 때부터 아이들이 학원으로 내몰린다. 나도 아이들을 키우면서 이건 아니다 싶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다. 

    

  어디 그뿐인가.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흔히 하는 말로 ‘스펙’을 쌓기 위해 남보다 더 노력해야 한다. 직장에 들어갈 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더 채우기 위해서. 토익이니 토플이니 하는 것은 기본이다. 거기에 온갖 자격증을 따려고 한다. 될 수 있다면 석사, 박사까지 딴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대학을 ‘상아탑’이라 불렀다. 진리를 찾고 학문을 연구하는 가장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뜻으로 대학을 그렇게 불렀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상아탑이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제 대학은 직장을 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해졌다는 의미일까.

     

  직장에 들어가면 또 어떤가. 동료를 누르고 승진하기 위해서는 남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해야 한다. 그만큼 열심히 일한다는 걸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새벽이나 밤에는 다른 나라 말을 배우기 위해 학원을 다니는 사람도 많다. 그렇게 치열하게 살다 보면 어느덧 퇴직할 나이가 된다. 그렇게 퇴직할 때쯤 되면 60 인생을 어떻게 산 건지 후회하게 된다. 다는 그렇지 않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인생을 산다. 퇴직 뒤에도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한다. 인생 참 재미없고 맛없다는 생각이 든다. 


  퇴직 뒤에 번듯한 집이라도 한 채 있으면 참 운이 좋은 거다. 월급을 모아 집을 장만한다는 얘기는 오래전에 이미 사라졌다. 대출을 끼고 집을 사서 퇴직 때까지 이자를 낸다. 퇴직 뒤에는 다시 역모기지론이라 해서 죽을 때까지 집을 담보로 연금을 받아 생활한다. 결국, 이 세상을 떠날 때는 태어날 때처럼 아무것도 남기지 않게 된다. 우리가 사는 인생이 이런 삶이란 걸 생각하게 되면 힘이 빠진다. 좌절도 하고 실망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아이들에게 나와 같은 삶을 살라고 강요하고 있다. 너도 이 아버지와 같이 죽어라 공부해서 남보다 월급 조금 더 많이 받는 직장을 구하라고 하고 있다. 인생이 뭔지를 알려주는 게 아니라 인간 피라미드에서 꼭대기에 올라가라고만 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분명히 이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 바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물질이 조금 부족한 삶은 참고 견딜 수 있지만 사랑이 없는 삶은 견딜 수 없다고. 

  남보다 조금 뒤처지면 어떤가. 남보다 조금 덜 가지면 어떤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모든 시간을 즐기고 행복할 수 있다면 붉은 여왕의 가설은 애써 외면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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