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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ks May 13. 2019

나는 석박사 대신 독서학교를 선택했다

겉으로 보이는 성공보다 내 안의 성장을 위한 삶

  나는 대학원에 가서 석․박사 학위를 따는 대신 나만의 ‘독서학교’를 선택했다. 책 읽기는 남이 경험한 것을 짧은 시간 안에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고, 내가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의 돈을 들여 여행하는 대신 1~2만 원으로 온 세상을 여행할 수 있는 최고의 ‘저비용 고효율’ 방법이기 때문이다.

  영국 비평가 겸 역사가인 토마스 칼라일은 ‘책이란 당대의 진정한 대학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른 퇴직을 가정하고 ‘독서학교’를 선택했다. 이 독서학교는 다른 누군가가 세운 학교가 아니다. 내가 스스로 세운 나만의 학교다. 따라서 이미 있는 교육체계로 나를 가르치는 게 아니다. 나 스스로가 설립자이자 선생님이고 학생이다. 나만의 가치를 가지고 나 자신에게 가르치며 배우고 성장해 가는 학교다. 그 교육지침이나 교육 방향은 앞으로 내가 만들어 갈 것이다. 그리고 교육과정은 계속 수정되어 더 나은 과정으로 바뀔 것이다.

      

  나는 가끔 타임머신이 실제로 있어서 중․고등학교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근데 실제 돌아가면 좋을까? 돌아가서 헛되이 써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까? 나는 어렵다고 본다. 그때로 돌아가도 공부하다 힘들면 샛길로 빠져 시간을 허투루 쓰는 짓을 똑같이 할 것 같다. 지금 이 정신 상태로는 그렇다. 새로운 꿈을 갖고 그 꿈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의지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근육을 기르지 않는다면 그때로 돌아간들 아무 쓸모가 없다.

  난 차라리 지난날 가운데 어느 한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학창 시절이 아닌 직장에 막 들어왔을 때로 돌아가고 싶다. 왜냐하면, 고등학교 공부는 다시는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억지로 지식을 넣는 공부는 하기 싫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고 막 일자리를 얻은 때로 가고 싶다. 그러면 전에도 말한 것처럼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지금 나이가 되었을 때는 훨씬 내 영혼이 풍요로워진 삶을 살고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진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빅터 프랭클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 이은 정신요법 제3 학파라 불리는 로고테라피 학파를 창시하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고, 이곳에서 그는 부모, 형제, 아내 모두 잃었다. 모든 가진 것들을 빼앗기고, 몸에 난 모든 털까지도 깎이어졌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빼앗긴 채 굶주림과 매서운 추위를 겪고 매를 맞기도 한다. 온갖 핍박을 받으며 몰려오는 죽음의 공포를 겪었다.

  수용소에 들어가는 순간 충격을 느끼고 그다음 집행유예 망상을 갖는다. 집행유예 망상이란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가 처형 직전에 집행유예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갖는 것이다. 수용소 안에서 온몸에 난 털이 하나도 남김없이 깎이고, 욕설을 듣고, 매를 맞고, 다른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면서 환상이 무너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벌거벗겨진 자신의 몸뚱이 말고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에는 자신은 물론이고 서로를 재밌게 해주려는 농담기가 일어난다. 이런 종류의 이상한 유머 외에 궁금증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즉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리고 결말은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을 무척이나 궁금해한다. 그런 식으로 그다음 찾아오는 놀라움, 두려움의 소멸, 무감각, 체념과 희망이라는 것들을 겪는다. 이와는 다르게 고통 뒤에 오는 그리움과 혐오감 그리고 모멸감 따위도 느낀다.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겪게 되는 것들을 가장 공포스러운 곳에서 보통의 삶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것들을 경험하고 살아남아 로고테라피라는 것을 만들어 낸 삶을 산 사람이다.

  빅터 프랭클은 이 책에서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고 한다. 

  내 주위를 둘러보아도 그렇다. 저녁에 술자리를 가거나 서너 명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들어보면 이 말이 꼭 맞다. 뒷날 목표를 가지고 있거나 꿈이 있는 사람들은 결코 지나간 일을 떠올려 그것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지 않는다. 목표가 없는 사람들이, 하루하루 주어진 일만을 수동적으로 하며 쳇바퀴 돌 듯 생활하는 사람들이 과거를 들추며 ‘나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하며 술잔을 기울인다.

     

  사람들은 보통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순의 학업 과정을 거친다. 물론 대학원은 쉽지 않다. 어린이집도 있지만 유치원이라 치자. 유치원은 짧게는 1년, 길게는 몇 년씩 다닌다. 그리고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을 거쳐 대학에 들어간다.

  나는 2019년 12월 31일을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것으로 목표를 정했다. 이 글은 바로 초등학교 졸업 작품이다. 이제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을 더 다녀야 한다. 혹시 대학원 2년을 더 다닐 수도 있다. 아니면 중학교, 고등학교를 더 일찍 졸업할 수도 있다.

  나는 내 지난날을 ‘독서 초등학교’로 값을 매기고 싶다. 그래도 현실 세계에서 대학을 나왔고 어느 정도 배웠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싶다. 그리고 지난 몇 년간 집중하여 책 읽기를 했으면 그래도 책 읽기에 대하여는 초등학교 나온 정도는 된다고 스스로 믿고 싶다. 유치원 수준이라 하면 나 자신을 지나치게 낮게 평가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독서대학이든 독서대학원이든 졸업을 하면 사회에 나가야 한다. 독서대학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사회에 나갈 수도 있다. 어쨌든 독서학교를 벗어난다는 것은 나에게 현실 세계에서 직장을 그만둔다는 의미이다. 은퇴를 말한다. 은퇴 뒤에 무엇을 할지 어떤 삶을 살지는 앞으로 남은 초․중․고등학교 혹은 그에 더하여 대학 생활로 결정이 될 것이다. 

  지금은 중학교 졸업 기준도, 고등학교 졸업 기준도 없다. 학력고사나 수학능력시험처럼 책 읽기는 평가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초등학교 6학년이라 하는 것도 내 생각이다. 그 기준을 나도 모른다. 그냥 막연하게 정한 것이다. 

  학교 졸업 기준을 책을 몇 권 읽었는지로 판단하는 것도 적절하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내가 어느 정도 생각이 성숙했는지, 내 영혼이 어느 정도 풍요로워졌는지는 더더욱 평가할 방법이 없다.

      

  내 아이들이 어린이집을 다닐 때다. 지금도 그 조그마한 딸아이가 검정 선글라스를 쓰고 친구들과 같은 옷을 입고 무대 위에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날마다 집에서 연습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내 기억에 꽤 오랫동안 연습을 했다. 내 딸은 그냥 친구들과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자체가 좋았다. 그래서 날마다 연습을 하면서도 지치지 않고 하였다.

  지금 내가 그렇다. 책은 시간 나는 대로 읽는다. 글은 할 수 있는 한 날마다 쓰려고 애쓴다. 한 문장을 쓰든 몇 장을 쓰든 이 자체가 즐겁다. 그래서 인터넷에 블로그도 만들어 나의 독서 노트를 그곳에 올리기도 한다.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고 그 사람들의 생각도 들어보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난 지금 초등학교 6학년이다. 졸업 작품을 쓰고 있고, 그것이 완성된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뿌듯하다. 초등학교 졸업하는 학생의 마음이 그렇듯이.

     

『나는 독서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 80년이라는 세월을 바쳤는데도
아직까지 그것을 잘 배웠다고 말할 수 없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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