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비전을 다시 세우다
나는 내 삶의 비전을 다시 세우고 있다. ‘다시 세운다’고 한 것은 이제껏 내가 살아온 삶의 방향이 진정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반성하여 새로운 쪽으로 손잡이를 돌린다는 뜻이다. 솔직히 마흔이 넘도록 내 인생 비전이 무엇이었는지 모른다. 비참하지만 아마 없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토드 홉킨스와 레이 힐버트가 쓴 『청소부 밥』(토드 홉킨스, 레이 힐버트 지음, 신윤경 옮김, 위즈덤하우스)이라는 책이 있다. 일에 파묻혀 사는 회사 사장(이름은 ‘로저’다)이 주인공인 청소부 ‘밥’에게 상담을 받으면서 인생의 진짜 의미를 찾아간다는 내용이다. 다음 문장은 여느 우리와 다르지 않음을 표현하고 있다.
사장은 중국 고객과의 중요한 계약 건으로 인해 부인의 생일을 깜빡 잊었고 그 후로 부인은 사장에게 말도 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자 사장은 집에 들어가는 것이 더 불편하게 느껴졌고 사무실에서는 일만 많아 일에 지쳐가는 상황이었다.
로저는 갑자기 마음 한편이 저려왔다. 그가 던져 넣은 더러운 접시는, 오늘 저녁 그가 함께하지 못했던 단란한 가족 식사에 놓였던 깨끗한 접시들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불현듯 자신이 가족 구성원 사이에 불쑥 끼어든 이방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살 바엔 차라리 사무실에 침대를 갖다 놓는 편이 낫겠군.’
아마 많은 40대 안팎의 직장인이 느끼는 문장일 것이다. 다행히 나는 아직 아내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을 잊은 적은 없다. 하지만 아내가 아이를 뱄을 때 사무실 핑계로 병원에 함께 가지 못한 적이 많았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내가 집보다 일을 먼저 생각하고 산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내 개인 발전을 위해 공부한다고 2년 이상 주말에 가족과 함께하지 못했던 지난날들이 떠오르자 얼굴이 닳아 오르고 왠지 가슴이 저미어 왔다. 그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이미 소비해 버린 시간이다. 아이들과 집사람에게 그 2년은 소중한 시간이었을 것이고 나와 함께 하고 싶은 것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아이들은 다 컸다. 어릴 때 아빠와 하고 싶은 것은 그때 해야 했다. 지금은 그것을 할 수 없다. 지금은 내가 딸들하고 뭔가를 하고 싶어도 딸들이 바빠서 함께 하지 못한다. 이제는 내가 딸들과 어디를 가자고 해도 딸들이 따라가지 않는다. 부모와 함께 있기보다 친구와 함께하기를 좋아하는 나이다. 이제 대학을 가게 되면 더 함께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결혼하게 되면 1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할 것이다.
그래서 남아 있는 시간이 더 소중하다.
어떤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이 무엇을 받을 수 있는지가 아니라
그 사람이 무엇을 주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