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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ks May 27. 2019

내 인생 시나리오는 내가 쓴다

나는 조연인가, 주연인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통해 나는 수용소에서도 사람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관습이 빚어내는 부작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시대나 사회가 내린 결정이 때로 다른 시대나 다른 사회의 사람에게는 놀라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결정을 내린 특정 시대, 특정 국가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도 오래전부터 늘 자신들과 똑같은 생각을 해왔다고 믿으며 이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확립한 규칙이 자명하며 누가 봐도 옳다고 여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이런 착각은 관습이 빚어내는 가공할 만한 부작용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관습은 사람들이 만들고 지켜온 행동 규칙의 타당성을 전혀 의심하지 못하게 만드는데, 관습은 이성적인 토의의 대상이 아니라는 일반적인 인식 때문에 이런 속성이 강화되고 있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것은 이성보다는 감정의 문제이며 따라서 이성은 필요하지 않다고 믿어왔다.

     

  우리가 학교에 다니던 때 선생님은 모범생을 원했다.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공부 열심히 하고 딴전을 피우면 안 된다. 사회에서는 모범시민을 원한다. 사회가 정해놓은 대로 열심히 직장에 다니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삶을 원한다. 직장에서는 모범직원을 원한다. 직장 규칙에 따라 군소리하지 않고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하는 직원이 칭찬을 받고 승진한다.


  내가 속해 있는 무리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관습을 그대로 따라가며 모범시민으로 살 것인지 아닌지는 내가 스스로 선택할 문제이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널리 인정되고 있는 규칙들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본다. 유치원으로 시작해 대학까지 다녀야 하는 규칙. 9시 출근, 6시 퇴근 규칙. 반드시 사무실에 출근하여 정해진 자리에서 일해야 한다는 규칙. 일주일 7일 중 5일 근무하고 2일 쉬는 규칙. 1년 중 20일 정도만 휴가를 갈 수 있는 규칙. 월요일 아침 9시 업무를 시작하면서 하는 팀장급 이상 전체 회의. 회의 시간에 아랫사람들은 뭔가를 받아 적어야 하는 규칙. 이 모든 것들의 타당성을 의심해 보기 시작한다.  

    

  주어진 환경에서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빅터 프랭클의 말처럼 내가 속한 조직에서, 내가 주인공인 내 삶에서 내가 어떻게 살 것이며,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는 나만이 선택할 수 있다. 상대가 인생의 주연이고 내가 조연이 아닌, 내 인생의 주연은 바로 ‘나’인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언젠가 죽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삶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리라.
30분 후에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는다.』
레프 톨스토이,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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