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원인은 다른 좋은 고통으로 없애야
할머니가 내 뒤에서 소리쳤다.
“웨일즈, 얘가 지친 것 같아요.”
할아버지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나를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의 얼굴은 널따란 모자 그늘에 가려 있었다.
“뭔가를 잃어버렸을 때는 녹초가 될 정도로 지치는 게 좋아.”
이 문장은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아름드리미디어)에서 가져온 것이다. 주인공은 체로키 인디언의 후손으로 이름은 ‘작은 나무(Little Tree)’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잃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가는 다섯 살 작은 나무. 작은 나무가 지친 것처럼 보이자 할머니가 뒤에서 할아버지에게 소리치자 할아버지가 작은 나무를 보면서 한 말이다.
‘뭔가를 잃어버렸을 때는 녹초가 될 정도로 지치는 게 좋아’라는 말이 뜻하는 게 뭘까. 우리는 힘들 때 우리 몸을 더 힘들게 할 때가 있다. 그렇게 하면 힘들게 한 원인이 사라진다. 예를 들어, 나 같은 경우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몸과 마음이 힘들면 러닝머신이나 운동장에 나가 달린다. 몇 킬로미터를 달리겠다고 정해놓고 달리는 게 아니다. 다리가 후들거려 더는 달릴 수 없을 때까지 그냥 달린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고 땀이 온몸을 적시고 다리는 풀려서 일어서기도 힘들 때까지. 그러다 보면 달리는 데에만 집중하게 되고, 무엇이 나를 힘들게 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달리고 난 뒤 흘러내리는 물에 몸을 담그면 몸과 마음이 상쾌해지고 잠도 잘 온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어제 받은 스트레스가 무엇이었는지, 왜 내가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다. 그렇게 힘든 걸 없앤다.
작은 나무의 할아버지는 그것을 말하기 위함이었을까. 아버지 어머니 모두를 잃은 작은 나무에게 알려주는 도움말일까. 부모를 잃은 슬픔에 지쳐 있는 아이에게 그 슬픔을 잊도록 알려주는 도움말이었을까. 마치 뭔가에 슬퍼 울다 울다 지치면 잠이 오는 것처럼.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며 온갖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뭔가를 얻지 못해서 일수도, 뭔가를 잃어서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얻지 못할 때보다 잃었을 때 더 큰 고통을 느낀다. 손에 쥐지 못하는 것보다 손에 쥔 것을 놓칠 때 상실감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작은 나무의 할아버지가 알려주는 대로 녹초가 될 정도로 지쳐보자. 몸이 지쳐 더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까지. 내가 경험해 본 바로는 몸이 녹초가 되면 나를 힘들게 고통의 원인이 분명 사라진다. 단, 술과 같이 정신을 흐릿하게 하는 것으로 몸을 녹초로 만들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