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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수 Jul 18. 2023

나도 가스라이팅을 당한 건가?

다 니 거야?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내가 가스라이팅을 당한 것인지? 객관적인 판단자료가 필요해서다.

말과 기억이라는 것은 희석되는 것이니까, '글로 남겨두면 나중에 나도 판단기준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기록을 남긴다.




지지리도  못살던 시절을 지나 지금 '베이비 부머' 세대로 불리는 아이들을 폭발적으로 출산했던 시기가 있었다.

오죽하면 '둘만 낳아 잘 키우자!', '셋도 많다. 둘만 낳자!'라는 표어를 썼겠는가?

지금 같은 저출산 시대에 들으면 어이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던 시절이었다.

셋부터는 의료보험이 안된 적도 있다. 그러니 아이는 조금 낳아야 하는데 아들을 낳고 싶으니까, 뱃속에서 딸이라고 판명이 나면 임신중절을 시키기도 했다니, 얼마나 딸이라는 존재가 대접 못 받던 시절이었겠는가?


우리 아버지는 아주 못 사는 농부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갓 20대가 되었을 때 그나마 매일 술 먹고 밥벌이 안 하던 아버지(나한테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실질적인 7남매의 가장이 되는 순간이었다.


젊었을 때, 아버지는 없는 집에서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뚜렷한 기술이 없었다. 그런데 많은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이 되었으니, 그 당시에 없는 집안 자식들이 그랬듯이 서울로 상경해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직장을 얻었다고 하지만, 본사가 서울에 있다 뿐이지 아버지의 일자리는 전국이었다. 현대건설 건설노동자로 전국에 있는 현대건설 건설현장 노동자로 일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외국에도 건설노동자로 나가서 일하게 되었으니, 한동안 '현대건설'이라는 말만 나와도 얼마나 애사심이 충만했는지 모른다.




엄마는 그런 가난한 집안에 빚더미에 앉아있다는 사실을 숨긴 아버지와 결혼을 했다.(사실 이 정도면 사기결혼 수준이랄까?) 엄마가 결혼했더니, 시어머니가 태어난 지 얼마안 된 막내 삼촌(아버지의 막냇동생)을 안고 있었다고 한다. 결혼해서 바로, 엄마는 큰 딸을 낳았고 우리 막내 삼촌은 큰언니와 2살 차이이다.


그 당시는 그런 시대였다. 아이들을 대책 없이 줄줄 낳던 시절이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막내 삼촌은 남기고 가신 것이다. 돈 버는 방법을 모르는 할머니와 7남매의 동생들을 먹여 살리느라 아버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돈을 벌어야만 했다.


그럼 자신이라도 아이를 조금만 낳아서 건사했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하지만 그 당시 시대정신에 발맞춰서 결혼을 한 아버지는 아이 다섯을 낳았다. 서울에 있는  아이 다섯과 시골에 7남매 동생과 어머니를 부양해야 했던 아버지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더운 나라(인도네시아,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등)를 돌아다니면서 건설현장에서 일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아버지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웠을까?

그런 집안에서 딸로 태어났다는 것은 희생이 기본 옵션이어야 했다.

턱없이 부족한 생활비로 아이를 키워야 했던 어머니는 어떻게 알았는지, '선택과 집중'을 했다.

아들한테 모든 것을 몰빵 했던 것이다. 서울대 학생 과외를 시켰던 아들, 참고서 하나 사서 쓰지 못했던 딸이 당연한 줄 알고 살았다.


좋은 먹을 것, 좋은 물건은 당연히 마지막에 고추를 달고 태어난 남동생의 차지였다.

누구 하나 토를 달고 그건 부당하다고 얘기하지 못했다. 그냥 아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그건 숨을 쉴 때 공기를 마시듯이 당연한 것이었다.


엄마는 평생 '돈이 없다.'라는 말을 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딸들은 어서 빨리 취직을 해서 돈을 벌고 어머니를 도와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다른 집도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아주 오랫동안~



시골에 있던 삼촌들이 성인이 되니, 또 다른 힘듦이 찾아왔다. 코딱지만 한 서울집에 삼촌들이 올라와서 같이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 번에 한 명 또는 두 명씩 서울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살았다. 삼촌들이 우리랑 밥 먹는 시간이 같으면 그건 양반이었다. 같은 시간에 오지 않고 다른 시간에 왔는데 엄마가 집에 없는 경우에는 딸들이 삼촌들의 밥을 차려야 했다. 국민학교 다녔던 어린 조카들이었는데 말이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작은 집에서 같이 살면서 겪었던 힘듦은 어느 순간 희석됐다. 계속 곱씹어봐야 나의 정신건강에 안 좋다고 나의 뇌가 그렇게 한 건지, 나빴던 기억은 싹 사라지고 어느새 같이 있으면서 좋았던 기억만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조카인 나도 이렇게 힘들고 불편했는데, '엄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는 생각을 나는 결혼을 해서 내가 살림을 하고 나서야 생각할 수 있었다. 뭐가 부당하고 뭐가 아닌지 판단하지도 못하고, 부모님이 원하는 착하고 욕심 없는 딸들로 라 났다. 결혼식 할 때 모든 축의금은 당연히 부모님을 드려야 하고, 월급을 받으면 당연히 부모님께 드리는 것이었다. 내가 정작 결혼할 때는 내가 번돈은 하나도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부모님을 도울 수 있어서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한달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많지는 않지만 재산을 남겨놓으셨다.

엄마는 딸들의 양보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유산 배분에도 연결됐다.

아버지의 모든 재산은 아들한테 조금씩 조금씩 몇 년 전부터 이전되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재산도 당당히 아들에게 주려고 한다.


그럴 줄 알면서도 딸들은 상속 포기각서를 썼다.

아버지 잃은 지 얼마 안 됐는데, 엄마까지 잃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지금까지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나, 지금까지 그게 당연한 게 아닌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게 '가스라이팅' 당했던 것일까?


어떻게 그게 당연하냐고 남편은 내게 말했다.

그게 '네가 가스라이팅 당한 거라고!'

남동생에게 묻고 싶다. 아버지의 남은 재산은 "다  네 것인 게 당연한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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