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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수 Dec 27. 2023

남겨진 이의 슬픔

그래도 인생은 계속된다.

며칠 전 한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기사를 봤다. 그런데 사망자가 2명이라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은 사람들은 대피하기 어려운 노약자들이 아니라, 누구보다 먼저 나갈 수 있었던 성인 남자 2명이었다. 한 사람은 새벽시간에 누구보다 먼저 화재를 인지하고, 집 식구들을 깨워서 대피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계단으로 가장 마지막에 대피하다가 연기에 질식해서 죽었다고 하다. 


또 다른 한 사람은 7개월, 2살 아이를 둔 가장 이었다. 3층에서 불이 났고 이 가족은 4층에 살고 있었다. 화재를 인지했을 때는 다른 곳으로는 대피할 수가 없었고, 온 가족은 베란다에서 탈출을 시도했다. 다행히 바닥에 포대가 있었고 밑에 있는 경비아저씨의 도움으로 큰 아이를 무사히 그 포대위로 던질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막내를 끌어안고 바닥으로 부인과 함께 뛰어내렸다. 얼마나 급박한 상황이었으면 4층에서 아이를 안고 뛰어내렸을까? 다행히 아이와 엄마는 무사했지만 가장은 머리를 크게 다쳐서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남겨진 가족의 슬픔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우리 집은 아파트 8층에 산다. 오래된 아파트여서 만약에 화재가 발생한다면 입구를 제외한 탈출구는 '완강기(고층 건물에서 불이 났을  몸에 밧줄을 매고 높은 층에서 땅으로 천천히 내려올  있게 만든 비상용 기구}.' 밖에 없다. 그런데 과연 화재가 발생한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아이들과 함께 8층에서 '완강기를 통해서 몸에 밧줄을 매고 밑으로 내려갈 수 있을까?' 생각해 봤다. 그건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다. 뉴스에 나온 가족은 4층이라 그나마 나머지 가족이 생존했지만, 우리 집은 8층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8층에서 뛰어내렸다 '살았다'는 얘기는 '기적'을 논 할 때 말고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기적같이 바닥에 있는 나무에 걸렸거나, 지나가는 사람 위로 떨어졌거나 하는 경우 말이다. 


가족 관련한 기사를 보게 되면 '나도 그런 경우에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나는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부모라면 아이들이 먼저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지 아이들은 살리려고 노력할 것이다. 위의 가족의 아이들이 살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자신의 희생으로 다행히 아이들은 생존했으니, 고인은 분명히 다행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 남은 가족은 어떨까? 나는 아버지가 올해 돌아가셨다. 남들이 말하면 '호상'이라고 할 만큼 연세가 들어서 돌아가셨다. 그래도 나는 문득문득 '어떤 순간'에 아버지가 생각나면 슬픔이 밀려온다. 아직까지도 누가 보든지 상관없이 눈물이 쏟아진다. 그럴 때는 엄마의 갱년기를 '또 운다'라고 비웃던 장난꾸러기 아이들도 아무 말이 없어지고, 내 등을 조용히 두들겨준다. 그러면 나는 거기에서 조용한 위로를 느낀다. 


남겨진 가족의 슬픔을 어떻게 우리가 가늠할 수 있을까? 자신을 희생하고 먼저 간 가족을 생각하면 아주 오랫동안 그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위해서 희생한 가족의 마음을 헤아려 이겨내기를 빈다. 먼저 간 가족은 남겨진 가족이 잘 살기를 얼마나 바라겠는가? 어려운 시간은 안 갈 것 같지만 그래도 흐른다. 힘들고 괴롭고 지치고, 때로는 넘어져 일어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 가족 모두 그들을 위해 먼저 간 가족을 생각해서 힘을 내기를 빈다. 남겨진 가족이 서로 등을 두들겨주고, 서로 위로하고 같이 있어주기를!  그들이 행복하기를 나는 조용히 빌어본다. 그래도 인생은 계속 가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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