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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a May 03. 2022

즉흥 여행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한때 유명했던 광고 카피입니다. 이 카피를 생각하면 순식간에 가슴에 문이 생깁니다. 그 문을 열고 나가면 하늘과 바다를 붉게 물든 휴양지의 일몰을 바라보며 칵테일 한 잔을 즐기고 있는 나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금요일 퇴근 시간이 되면, ‘지금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 아니,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메케한 도시 내음에 저항하며 내게 밀려오곤 했습니다. 하지만 퇴근 후 한 시간 정도가 흘러도 어딘가로도 떠나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에서 광고와 현실 사이의 괴리감만 깨달으며 씁쓸하게 어둑해지는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습니다.      


여행은 국내나 해외 어디로 가든 즐겁고 멋진 경험입니다. 하지만 내게 있어 가장 짜릿하고 여행의 참 묘미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즉흥적으로 떠났던 여행이었습니다. 그 여행에는 젊음의 객기가 어느 정도 작용했습니다. 그 여행이 다른 여유롭고 편했던 여행보다 더 기억에 남는 이유는 지금은 그런 객기를 부릴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일탈이었으니까요. 내가 지금 지난날처럼 객기를 부리기엔 현실에 너무 매어 살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내 기억 속의 즉흥 여행은 대학교 4학년 때였습니다. 모두들 학교 시험공부와 취직 준비를 위해 6시에 열리는 도서관 자리를 잡기 위해 새벽 5시부터 줄을 서 기다리다 도서관 자리를 잡고 하루 종일 공부하다가 10시 이후에는 동아리방으로 옮겨 계속해서 공부했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초조해지는 시기였습니다. 벌써 취직이 된 선배도 있었고, 일찌감치 대학원으로 방향을 정한 친구들도 있었습니다만 대부분은 취직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일주일에 3,4일은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10월의 어느 금요일 저녁 나를 포함해 같은 스터디그룹이었던 네 명이 도서관에서 한 테이블에 앉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공부하다가 선배 한 명이 ‘야, 우리 바람 쐬러 갈래?’라고 쓰인 교재 뒷면을 테이블 가운데로 내밀면서 나머지 세 명의 동조를 구했습니다. 나는 그 아래에 “어디로?‘라고 쓰며 선배를 바라봤습니다. 그러자 그 선배는 ‘설악산’이라고 썼습니다. 우리는 그저 소리 없이 웃고 말았습니다. ‘이 늦은 시간에 어떻게 설악산을 가겠냐?’는 의미에서 스치고 지나갈 농담으로 치부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서로 농담으로 ‘그럼, 가자’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잠시 도서관 뜰이나 걸을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그 선배는 진짜 가자고 했습니다. 그 선배는 학교에 차를 운전해서 다녔기 때문에 그 차로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나머지 세 명은 운전면허증은 있었으나 나와 한 친구는 면허증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상태라서 운전을 하게 되면 경험 있는 두 명이 교대해야 했습니다. ‘정말?’,‘진짜?’ 이런 말이 오고 가다가 “그래, 가자!”로 동조하고 재빨리 도서관에서 가방을 챙겨서 나왔습니다. 그 길로 우리가 탄 차는 곧장 동해안을 따라 설악산을 향해 달렸습니다. 삼십 분 정도는 이래도 되나 싶어 마음이 무겁기도 했지만, 점점 집에서 멀어질수록 무거운 마음은 사라지고 짜릿함이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는 한껏 들떠서 여행에 몰입해 갔습니다. 취직 준비도 시험공부도 그 순간부터는 잠시 덮어두기로 했습니다.      


해안을 따라 나 있는 국도를 올라가다가 중간중간 멈춰서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도 듣고 먼바다에서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배들을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밤이라 보이는 것은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래도 이런 즉흥적으로 떠나는 여행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기분은 최고였습니다. 간간이 휴게소에 커피를 마시러 들렸습니다. 한적한 국도 휴게소에는 제법 쌀쌀한 밤공기에 입김을 내며 커피나 차를 마시며 흥겹게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듣자니 그들도 밤에 출발해서 어딘가로 여행을 가는 듯했습니다. 우리가 그랬듯 그들도 매우 들떠있음을 대화와 표정에서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곳의 휴게소는 고속도로에 있는 휴게소와는 분위가 사뭇 달랐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몇 군데의 휴게소를 들르는 것은 마치 20세기 미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인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자동판매기 Automat>나 <밤을 새는 사람들 Nighthawks>, 그리고 <주유소 Gas>와 같은 그림 속을 차례대로 들어갔다가 나온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동해를 지나 경포대에 들렀을 때는 날씨가 너무 쌀쌀해서 우리는 온몸을 움츠리며 해변을 거닐었습니다. 우리가 거친 바람을 맞으며 경포대 해변을 걸었던 것만으로도 그 순간을 추억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바다를 향해 몇 차례 고함을 지르고 나니 추위도 느껴지질 않았습니다. 차 안으로 들어왔을 때 차가운 바닷바람에 얼얼해진 얼굴이 풀리면서 후끈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대관령을 지날 때는 서울 쪽에서 오는 여행자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금요일 밤에 출발해서 주말여행을 온전히 즐기려는 사람들이었지요. 이윽고 우리는 설악산 국립공원에 도착했지만, 새벽 1시가 지난 시간이라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설악산을 상상하는 것과 설악산 아래 공기를 마시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가장 멋진 장면은 춘천 소양호를 지날 때 펼쳐졌습니다. 교대로 운전하는 두 사람이 너무 피곤해서 안전한 곳에 차를 세우고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습니다. 밖은 완전히 어두워진 상태여서 우리는 차 안에서 눈을 감고 밀려오는 피곤을 떠안고 짧지만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눈을 뜨고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나왔을 때는 서서히 날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그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물안개가 호수 위로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장면에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습니다. 아름다움을 넘어 신비롭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요. 나는 감탄사만 연거푸 내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감동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내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순간이었습니다. 호수는 바다와는 또 다른 느낌을 줍니다. 바다가 거칠고 역동적이라면 호수는 평온하고 신비스러움을 담고 있습니다. 호수 위에 고요히 떠 있는 안개는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까지 경험한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감동의 순간이었습니다. 그곳이 마치 신의 영역처럼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의 감동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서해로 향했습니다.      


서해안을 따라 내려오는데 운전하던 두 사람이 계속 졸음이 몰려와 방향을 틀어 중부 내륙고속도로를 타고 집으로 내려왔습니다. 집에 도착했을 때의 시간은 일요일 새벽 2시였습니다. 금요일 저녁 8시에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즉흥적으로 떠났던 우리의 여행은 일요일 새벽 2시에 끝났습니다. 꼭 서른 시간의 즉흥 여행이었습니다.


편안한 호텔에 묵으면서 호화로운 여행을 했던 기억보다 어떻게 보면 초라해 보이는 그때의 즉흥 여행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치고 힘들 때 잠시 그늘에 앉아 쉬어가는 것만으로도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걷게 하는 힘을 얻지요. 그때의 즉흥 여행은 막연한 미래의 문을 열기 직전에 찍었던 달콤한 쉼표였습니다. 그 쉼표로 인해 사회에 나아가 정신없이 달려가는 중에도 한 번 씩 미소 지을 수 있었습니다.


여행에서 무엇을 했느냐보다는 떠남 자체가 살아가는 데 큰 힘을 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떠남에서 각자가 갈망하는 오아시스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목이 마를 때는 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시원한 물 한 잔이면 되는 것이니까요. 앞으로는 언제든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도록 가볍고 단순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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