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면서 인간이기에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고 감내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상실, 즉 죽음에서 오는 슬픔이다. 인간에게는 생명이 주어지는 동시에 죽음도 함께 주어진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순리임을 차가운 머리로 아무리 인지하고 있을지라도 뜨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면 죽음의 두 가지 형태를 통해 죽음을 기억하는 법에 대해 생각하고자 한다.
먼저 나이가 들어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경우라면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살아낸 고인에게 슬픔 대신 오히려 축하와 박수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두가 침울한 장례식 대신에 목숨이 다할 때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한 이를 위한 축하와 감사 파티를 열어야 한다. 물론 이런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은 있어도 실제로 그렇게 실행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고인이 고령인 분의 장례식에 가서 안타까움을 전할 때 그래도 호상(好喪)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상갓집에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이 바로 ‘호상(好喪)이다.’는 말이라고 사람들은 지적한다. 고인이 아무리 나이가 많다고 하더라도 가족의 일원을 상실한 슬픔에 있는 상주에게 호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이다. 상주의 입장에서는 호상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죽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거기에 미치지 못한 까닭이다. 고인의 생애를 축하하고 감사하는 파티가 열리는 장례식을 상상해 본다.
또 다른 형태의 죽음은 나이와 상관없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마음이 몹시 아프다. 병을 발견하고 투병하고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시간은 환자나 가족 모두에게 고난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암이라 해도 수술이나 항암치료 기술이 발달해서 완치되는 사례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래서 암이 더 이상 죽음과 직결되는 병이 아닌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아직도 암이 치명적이다. 갑작스럽게 발병한 암이 짧은 시간에 커지고 전이되는 바람에 수술할 시기를 놓쳐버리고 항암치료의 효과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버리는 경우가 그렇다. 그런 상황을 가족의 일원으로서 받아들이기는 몹시 힘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에 좌절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다. 이런 무기력함은 죽음이 닥치기 훨씬 전부터 매 순간순간 모두를 우울하게 만든다. 누구보다도 힘든 사람은 죽음의 문턱을 넘고 있는 당사자다. 머리카락은 하나도 남지 않았고 몸은 너무나도 허약하게 말라버린 채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는 사람 앞에서 차마 눈물을 보일 수가 없다. 끝날 것 같지 않던 길고 긴 고통과 암울의 시간을 지나 무기력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별의 순간에 놓이게 된다. 그렇게 상실의 시간을 겪고 나면 고통스럽고 암울했던 기억은 사라지고 소소한 일상의 행복한 순간들이 소중한 추억이 되어 남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빛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각자의 마음속에서 추억의 조각들을 꺼내 보며 떠난 사람을 기억한다. 상실의 슬픔은 우리가 잊으려고 애써야 할 일이 아니라 기억해야 하는 일이다. 죽은 이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한 죽음이 완전한 끝은 아니다. 세월이 흘러 더 이상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때, 그때 비로소 진짜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오늘은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투쟁한 한 사람을 애도하는 날이기에 위의 두 형태의 죽음만을 생각하고 싶다.
오늘은 누군가의 기일이다. 며칠 전부터 우리는 고인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하고 어떻게 추모할 건지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눴다. 코로나가 유행하고 있는 시점에서 바다를 건너 함께 모일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방법으로 추모하기로 했다. 성당 다니는 사람은 성당에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교회에서, 절에 다니는 사람은 절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추도한다. 종교는 다를지라도 고인을 추모하는 마음은 서로 통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나는 나의 죽음을 준비한다.
나도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리라.
그때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오늘의 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