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석이 떠난 후 재하는 진순이를 데리고 집 뒤편 언덕에 올랐다. 그곳에서 시작하는 오솔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거북이 펜션이 나왔다. 재하는 지난밤 그 넓은 펜션에서 혼자 지냈을 선영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산책 삼아 거북이 펜션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볼 생각이었다. 진순이는 재하 앞에서 거북이 펜션 쪽으로 빠르게 달려갔다가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가끔은 풀밭에 들어가서 벌레를 잡는지 펄쩍펄쩍 뛰었다.
재하와 진순이 거북이 펜션 후문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여섯 시 십 분이었다. 펜션 내부가 조용했다. 선영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재하는 진순이를 데리고 펜스를 따라 정문으로 향했다. 가면서 펜션 안쪽을 살펴봐도 이상한 점은 없었다. 정문에서 바라본 운동장과 정원도 청량한 새소리와 함께 평온한 아침을 맞고 있었다.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한 재하는 휘파람을 불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후문에 도달했을 때 진순이가 재하를 보고 짖었다. 안으로 들어갈 건지 아니면 곧장 집으로 갈 건지 묻는 것 같았다. 재하는 안을 다시 살펴보고는 “이제 집으로 가자, 진순아.” 하자 진순이가 먼저 고개를 돌려 집으로 향했다.
“아이고, 착하네, 우리 진순이.”
한편 선영은 자다가 개 짖는 소리에 눈을 떴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소리였다. 어제저녁에도 들었던 소리, 진순이가 짖는 소리 같았다. 선영은 곧장 일어나 고무줄로 머리를 질근 묶고 밖으로 나갔다. 주위를 둘러봐도 더 이상 개 짖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어, 내가 잘못 들었을 리는 없는데.”
선영이 본관 앞을 지나 정원 한가운데에 있는 분수대에 이르렀을 때 오른쪽 언덕에서 개 짖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흰 개 한 마리가 보였고 그 뒤를 검은색 운동복 차림의 남자가 따랐다. 선영은 한눈에 재하와 진순이라는 걸 알았다. 산책 나왔다 돌아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가까운 곳에 재하가 살고 있다는 게 실감 났다. 이 아침에 재하와 진순이를 보니 더욱 반가웠다. 마음 같아선 손을 번쩍 들고 좌우로 흔들면서 큰 소리로 재하와 진순이를 부르고 싶었다. 선영은 흐뭇한 표정으로 재하와 진순이가 언덕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안으로 들어왔다.
선영은 우유에 시리얼을 말아 아침 식사를 하고 집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미자가 워낙 깔끔해서 모든 게 잘 정리 정돈된 상태였지만 집이 한 달 넘게 비어있던 터라 장식장 위에 내려앉은 먼지가 눈에 보였고 바닥도 꺼끌거렸다. 본관은 관리인 부부가 매일 청소하고 있어서 미자가 사는 별관만 청소하면 될 것 같았다. 선영은 먼저 청소기를 돌려 먼지를 빨아들인 다음 물걸레로 거실 바닥을 닦았다. 이어서 미자의 방으로 들어가 바닥을 닦았다. 들어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미자의 방은 단출하다 못해 썰렁하기까지 했다. 바닥에 요를 깔고 자는 게 편해서 침대는 없다고 치지만, 칠십 넘은 노인들도 쓰는 화장대도 없었다. 방에 있는 가구라고는 문 두 짝짜리 농이 전부였다. 농 안에 가지런히 걸려 있는 옷들은 대체로 무채색 계열의 원피스로 미자가 손수 염색한 천으로 만든 것들이었다. 미자는 외모를 치장하는 일에 관심이 없어서 옷이나 액세서리나 화장품에 돈을 쓰지 않았다. 미자가 얼굴과 손에 바르는 건 대용량의 순한 보디로션뿐이었다. 언젠가 선영이 미자에게 화장품 세트를 사준 적이 있었다. 그때 미자는 선영에게 고맙다고 하면서도 두 번 다시 화장품을 사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 이유는 화장품의 향이 하나같이 강해서 머리가 지근거린다는 것이었다. 선영은 미자가 수도원에서 생활하던 습관이 몸에 배어 그런 거라고 짐작했다.
“고모, 내 결혼식 때는 화장해야 할 텐데 그땐 어떡해요?”
선영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당연히 해야지. 그날은 너무 기분이 좋아서 화장품 냄새인지도 모를 거다.”
미자는 선영이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선영은 그때를 생각하며 농 아래 1단 서랍 위에 놓인 대용량 보디로션을 들어 올렸다. 거의 다 쓰고 손가락 한 마디 정도만 남아 있었다. 나중에 병원에 갔다 오면서 마트에 들러 하나 사야 할 것 같았다.
청소를 마친 선영은 점심시간에 맞춰 미자를 면회하기 위해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 현관문을 잠그고 돌아설 때 숙직실이었던 별관 옆에서 소리가 나서 그쪽으로 가보았다. 관리인 할아버지가 자재를 정리 중이었다. 선영이 관리인에게 웃으면서 인사하자, 관리인도 선영이 왔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반가워했다. 선영이 미자에게 가는 길이라고 하자, 관리인은 여기 걱정은 하지 말고 회복하는 데에만 신경 쓰라고 미자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선영은 고맙다고 말하고 정문을 향해 걸었다.
정문에서 나온 선영이 마을버스 정류장으로 내려가면서 시간을 보니 마을버스가 오려면 아직 10분이 남아 있었다. 마을버스 배차 간격은 한 시간이었다. 천천히 내려가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예상대로 선영이 정류장에 도착하고 얼마 안 있어서 마을버스가 먼지를 뿜으며 다가왔다.
버스 안에 탄 승객들은 하나 같이 말쑥하게 차려입은 노인들이었다. 미자에게 듣기로는 그들 대부분은 병원에 가는 길이었다. 버스가 모퉁이를 돌아 다음 정류장이 가까워지자 맨 뒤쪽 좌석에 앉은 선영은 오른쪽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정류장에서 언덕으로 이어진 비포장도로 끝에 말끔한 한옥 한 채가 보였다. 바로 재하의 집이었다. 마당 한쪽에 세워진 재하의 흰 SUV 윗부분이 보였다. 마당에는 진순이도 있을 것이었다. 선영은 진순이를 생각하는 동시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선영은 병원에 가서 미자에게 펜션에서도 개를 키우면 어떻겠냐고 말해 볼 생각이었다. 재하가 진돗개를 구해준다고 한 이야기를 하면 아마 미자는 고마워하며 흔쾌히 승낙할 것이었다.
선영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앞을 보고 가다가 문득 재하의 유튜브 채널이 생각났다. 열차 안에서 어떤 콘텐츠인지 훑어봤을 뿐 아직 영상을 시청하지는 못했다. 휴대전화를 꺼내 이어폰을 꽂은 다음 유튜브 앱을 열었다. 가장 최근에 올라온 영상은 재하의 일상을 담은 브이로그였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경쾌한 오카리나 연주와 함께 섬네일이 나타났다. 흰 개 한 마리와 한 남자가 달리는 삽화였다. 개는 진순이일 테고 남자는 재하일 것이었다. 선영이 보기에 아주 잘 그린 삽화였다. 책 표지로 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어서 진순이를 데리고 산책하는 장면이 나왔다. 카메라가 오른쪽으로 돌아가자, 언덕 아래로 어딘지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기다란 흰 건물 앞쪽으로 잘 가꾸어진 정원, 그 앞으로 운동장이 펼쳐졌다. 여기는 바로 거북이 펜션! 이렇게 반가울 수가! 아마도 이른 아침에 촬영한 것 같았다. 영상으로 보는 거북이 펜션의 아침은 아주 근사했다.
저 멀리 섬진강 물줄기도 보였다. 영상이 흔들리지 않고 깔끔했다. 선영은 재하의 촬영 솜씨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편집 솜씨도 좋아 보였다. 가장 인상적인 건 장소가 바뀔 때마다 들리는 진순이의 멍멍 짖는 소리였다. 선영은 그 소리가 나올 때마다 쿡쿡 웃었다. 뒤이어 텃밭을 가꾸는 장면이 나왔다. 상추와 오이를 따면서 신기해하는 재하의 표정이 귀여워 보였다. 재하가 영상 제작에 정성을 많이 들였다는 게 느껴졌다. 10분 남짓 동영상 한 편을 보면서 재하가 이곳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선영은 문득 자기도 이곳에서 살면 어떨까, 하는 물음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