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이 지나고 선영과 미자는 병원 건물 뒤편 정원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날씨가 화창한 덕에 따뜻한 봄볕이 선영의 몸을 나른하게 데웠다.
“고모, 저도 여기서 살까 봐요.”
선영이 웃는 얼굴로 미자를 슬며시 보며 말했다.
“그럼, 나야 좋지. 나는 언제든지 환영이다. 근데 주호랑 출판사를 놔두고 그럴 수 있겠어?”
미자는 선영이 괜히 한 번 해보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선영이 이곳을 점점 좋아하는 것 같아 내심 기분은 좋았다.
“출판사 일은 인터넷이 되는 곳이면 어디에서도 할 수 있으니까 여기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거든요.”
“그래도 주호가 허락하겠어?”
“고모는, 제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누구 허락받고 말고 할 게 뭐 있어요.”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여기에 잠깐 내려와 있을 때도 출판사 일 걱정하느라 편히 있지도 못했으면서…….”
“그러게요. 맡겨놓으면 다들 잘할 텐데 그땐 제가 왜 그랬는지 몰라요. 제가 아니면 안 된다는 아집만 세 가지고 말이에요.”
선영은 말하면서도 미자가 걱정할까 봐 별거 아니라는 듯 헤헤 웃었다.
“그때는? 그러면 지금은 아니라는 말이니?”
“왜요? 아닌 것 같아서요? 헤헤.”
“혹시 출판사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니?”
“일은요. 출판사는 이제 자리가 잡혀서 제가 일일이 간섭 안 해도 잘 돌아가서 하는 말이에요.”
“그게 다 그동안 네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애쓴 덕분이지. 이제부터라도 네가 다 할 생각하지 말고 숨 좀 돌리면서 해라.”
“그래서 여기 온 거예요. 이참에 푹 쉬었다 가려고요. 고모 퇴원해도 혼자 힘드실 거니까 제가 도울 수도 있고, 이래저래 잘됐어요.”
“나는 말만 들어도 좋구나.”
“숙박 앱에 들어가서 보니까 펜션은 지금 휴업 중이라고 뜨더라고요.”
“퇴원해도 당분간 손님 받기는 힘들 것 같아서 일단 휴업 처리했는데, 여름 휴가철에나 다시 예약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지금이 4월이니까 2, 3개월 정도는 여유가 있는 거네요. 다시 시작할 때 저도 자주 와서 도울게요.”
“주말에 여기 와서 일하면 언제 쉬려고?”
“주말 아니라도 와 있으면 돼요. 인터넷만 되면 오케이라니까요.”
선영이 의아해하는 미자를 보고 생긋 웃었다.
“그건 그때 가서 보도록 하자꾸나.”
미자는 선영의 심경에 변화가 있는 것 같아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인지 다시 묻고 싶었지만, 선영이 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어렸을 때부터 선영은 무슨 일이 생기면 먼저 말하는 법이 없었다. 혼자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갖는 게 먼저였다. 미자는 혼자서 애쓰는 선영이 안쓰러웠지만, 선영은 얼마간의 시간을 갖고 나면 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으며 다시 밝은 모습을 되찾았다. 미자는 그런 선영을 잘 알기에 선영이 혼자서 너무 힘들어하지 않기를 기도하며 스스로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까지 기다리는 쪽을 선택했다. 그러면서도 만약 선영의 부모가 살아있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했다.
“아 참, 고모, 펜션에서 진돗개 한 마리 키우면 어때요?”
선영은 문득 재하가 한 말이 생각나 손뼉을 치며 말했다.
“개를? 글쎄, 개 한 마리 키우면 좋겠다는 생각만 했지 아직 알아보지는 못했네. 근데 진돗개는 구하기 힘들지 않니?”
“사실 제가 아는 작가님이 거북이 펜션 근처에 살더라고요. 그 작가님이 진돗개를 기르는데 펜션에서 개 기를 생각 있으면 한 마리 구해주겠다고 해서요.”
“그래? 그렇게만 되면 좋지. 참 고마운 분이네.”
“듣고 보니 펜션에 개가 있으면 여러모로 좋을 것 같더라고요. 작가님한테는 일단 고모와 의논해 본다고 했어요. 고모만 좋다고 하시면 작가님에게 부탁해 보려고요.”
“그럼, 그렇게 하고 언제 그분 식사 초대라도 해야겠다. 근데 여기에 누구 아는 사람이 산다는 말을 못 들었던 것 같은데?”
“저도 이번에 알았어요. 고속열차 타고 여기 내려올 때 그 작가님이랑 우연히 나란히 앉아서 왔는데, 그 작가님 고향이 구례라고 하더라고요. 지금은 글 쓰려고 서울 생활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와서 살고 있고요. 근데 작가님 집이 어딘지 아세요?”
“어딘데? 펜션 근처라고 해도 다들 꽤 멀리 떨어져 있는데…….”
“고모, 놀라지 마세요. 펜션 오른쪽에 언덕 있죠. 그 언덕 너머가 그 작가님 집이더라고요.”
“거기라면 버스 한 정거장 전에 보이는 그 한옥인가 보네.”
“맞아요. 고모도 알고 계셨네요.”
“그럼, 공사할 때부터 오가면서 많이 봤지. 내가 여기 내려왔을 때는 빈집이었던 곳이 너무 근사하게 바뀌어서 지나다닐 때마다 쳐다보게 되더구나. 나도 누가 집을 저렇게 멋지게 지어서 사나 궁금했는데 글 쓰는 작가였구나. 그러고 보니까 그쪽에서 개 짖는 소리가 났던 것도 같네.”
“그 개가 진돗개예요. 이름은 진순이고요.”
“진순이? 하하하,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이름 한번 잘 지었네.”
“그렇죠? 그 작가님이 지었대요. 이름 때문인지 처음 봤을 때부터 친근하더라니까요.”
“나중에 펜션에서 개를 기르게 되면 그 작가님한테 이름 지어달라고 부탁해야겠다. 하하하.”
“어머, 그럴까 봐요. 하하하.”
선영은 온화한 햇볕을 쬐며 오랜만에 미자와 나란히 앉아 웃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좋았다. 이렇게 소소한 일로 웃고 살다 보면 서울에서 있었던 안 좋은 기억도 아득하게 느껴질 날도 빨리 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 참, 고모 휴대전화 수리 맡겨놓은 데가 어디예요? 제가 가서 찾아오게요.”
“안 그래도 보호사님이 나중에 오면서 찾아온다고 했어. 오늘 저녁 근무거든.”
“아, 그래요. 그럼, 나중에 필요한 거 있으면 전화하세요. 내일 올 때 가져올게요.”
“그래. 여긴 매일 안 와도 되니까 집에서 좀 쉬어라.”
“그 넓은 펜션에 혼자 있는 것보다 여기 오는 게 바람도 쐬고 좋아요.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서 고모 보디로션 하나 사야겠어요. 집에 있는 건 거의 다 썼더라고요. 하나 더 사서 여기도 하나 갖다 놓을까요?”
“아니, 1층 매점에서 작은 거 하나 사서 쓰고 있는데 아직 남았어. 근데 장은 좀 봤니? 혼자 있다고 대충 먹지 말고 잘 차려서 먹어, 알았지?”
“혼자서도 잘 챙겨 먹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안 그래도 저녁에는 된장국 끓일 생각이에요.”
“그래, 잘 생각했다.”
병원에서 나온 선영은 K마트에 들러 미자의 보디로션을 샀다. 마트에서 나와 버스터미널 앞 마을버스 정류장으로 걷고 있을 때 펜션으로 가는 마을버스가 옆으로 지나갔다. 선영은 혹시나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을버스 정류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이번 버스를 놓치면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하거나 택시를 타야 했다. 선영이 숨을 헉헉거리며 정류장에 도착해서도 탈 사람들은 버스에서 사람들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부분 노인이라 내리는 데 시간이 걸렸다. 버스 기사도 “어르신, 조심해서 천천히 내리세요.” 하면서 룸미러로 승객들이 안전하게 내리기를 지켜봤다. 기다리는 사람들도 노인들이 타고 내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일상적인 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서울 같았으면 인상 쓰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선영 자신도 시간이 지체되는 이런 상황이 마뜩잖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누구 하나 싫은 내색을 하는 이가 없어 보였다. 속으로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