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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 Oct 01. 2024

제11화 준석

 샤워를 마친 재하는 감정 일기를 쓰기 위해 작업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그날 하루를 돌아보며 감정 일기를 쓰는 것은 하루도 빠지지 않는 그의 루틴이다. 감정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심리학을 공부하면서부터였다. 일기를 쓰다 보면 자신의 감정이 어떤 상황에서 긍정적으로 되고 어떤 상황에서 부정적으로 되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부정적인 감정이 생겨났다면 왜 그런지 자기 내면을 들여다봤다. 그 과정을 통해 그 감정을 일으킨 무의식 속 원인을 찾아 수용함으로써 부정적인 감정을 점차 줄일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감정 일기를 씀으로써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도 파악할 수 있어서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데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재하는 한참 자신의 감정을 기록하다가 기차 안에서 선영을 우연히 만났던 순간이 떠오르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우연이 다 있지?”

 재하는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하다. 누구나 같이 있으면 편해져서 평소와 다르게 말을 자꾸 하게 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재하에게 선영이 그랬다. 출판사에서 선영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걸 느꼈다. 그 이후로도 쭉 그랬다. 오늘 기차 안에서도 그랬고 터미널 앞에서 우연히 만나 펜션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그랬다. 재하는 일기를 쓰는 내내 히죽히죽 웃음이 나왔다. 다시 생각해도 오늘 하루는 행운이 봄볕처럼 쏟아진 날이었다. 

 그때 밖에서 진순이가 날카롭게 짖었다. 

 ‘이 시간에 누가 올 사람도 없는데 왜 짖는 거지?’ 

 재하는 “진순아, 왜 그래?” 하면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진순이가 집에서 나와 밖을 향해 짖었다. 재하는 진순이가 향하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저만치에서 작은 불빛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이마에 헤드랜턴을 쓴 누군가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었다. 

 ‘누가 이렇게 어두운 밤에 자전거를 타고 오는 걸까?’ 

 재하는 마당 끝까지 나가 불빛이 더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재하의 집이 조금 높은 곳에 있어 마당 끝에 서면 전방이 막히는 것 없이 다 들어왔다. 재하는 그렇게 바라보는 게 좋아서 원래 있던 담장을 모두 헐어버렸다. 마침내 10미터 전방에서 자전거가 멈추고 헤드랜턴을 착용한 사람이 자전거에서 내렸다. 그가 재하를 보고 “형, 저 준석이에요.” 하고 말했다. 

 “준석이? 야, 준석아, 밤에 위험하게 웬 자전거야? 올 거면 전화하지 그랬어. 내가 차로 데리러 갔을 텐데.”

 “그렇게 됐어요. 저 때문에 자다가 깬 건 아니죠?”

 준석이 재하 앞에 서서 씩 웃었다. 

 “나야 자려면 아직 멀었지. 일단 들어가자.”

 준석은 마당에 자전거를 세우고 헤드랜턴을 벗어 자전거 손잡이에 걸었다.

 “진순아, 잘 있었어?”

 준석이 진순이에게 다가가 등을 쓰다듬자, 진순이가 좋아서 준석의 손을 정신없이 핥았다. 

 “진순아, 오빠 보고 싶었어? 그래, 보고 싶었다고. 아이고, 나를 반겨주는 사람은 우리 진순이밖에 없네.”

 준석이 진순이를 보고 좋아서 입꼬리가 올라갔다.

 “뭐래? 누가 들으면 내가 문전박대라도 하는 줄 알겠다. 그만 들어가자.”

 재하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뭐 마실 거라도 줄까?”

 재하가 거실 소파에 앉은 준석에게 말했다.

 “형, 혹시 맥주 있어요?”

 “냉장고에 캔맥주 있는데 그거라도 줄까?”

 “아니, 제가 가져다 마실게요. 형도 맥주 마실 거면 하나 갖다줄까요?”

 “그래, 나도 한 모금 마시자. 아, 싱크대 위 선반에 땅콩 있으니까, 그것도 가져와라.”

 작업 테이블에 앉아 있던 재하가 냉장고로 가는 준석에게 말했다. 

 잠시 후 재하와 준석은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아 땅콩을 안주 삼아 맥주를 홀짝였다.

 “근데, 이 시간에 온 걸 보니까, 무슨 일 있었구나, 그렇지?”

 재하가 땅콩 하나를 입에 넣고 오도독 깨물며 말했다.

 “하, 아버지랑 한바탕하고 자전거로 돌아다니다가 여기까지 온 거예요.”

 준석이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켠 다음 말했다.

 “무슨 일로?”
 “빤하죠, 뭐. 나보고 다른 데 가서 일할 생각하지 말고 마트에 나와서 일하라는 거죠.”
 “내 생각엔 다른 일 하기 전에 당분간 그래도 될 것 같은데, 넌 싫어?”

 “난 아버지랑 같은 공간에 있는 것 자체가 싫어요. 지금도 부딪히는데 마트에서 일하면 얼마나 더 부딪히겠어요.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준석은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럼, 슬기랑 같이 살겠다면서 앞으로 어쩔 생각이야?”

 “안 그래도 요리사를 구하는 데가 있는지 알아보고 있어요. 일을 구하고 나면 방 하나 구해서 슬기랑 같이 살 거고요.”

 “슬기랑은 이야기한 거야?”

 “네. 슬기도 그러자고 했어요.”

 “집에 들어가서 사는 거 다시 생각해 보지 그러냐. 집에 들어가서 살면 방은 안 구해도 되니까 너도 부담이 훨씬 줄 텐데.”

 “난 아버지한테 의존하기 싫어요. 어떻게 해서든 우리 힘으로 살 거예요.”

 “너도 고집은 알아줘야 해. 못 이기는 척하고 작은아버지가 하자는 대로 하면 될 것을. ……가만 보면 작은아버지나 너나 똑같아.”
 “저도 형 말대로 그러고 싶은데 막상 아버지 얼굴 보고 있으면 그게 잘 안 돼요.”

 준석이 한숨을 내쉬며 맥주를 들이켰다.

 “작은아버지가 너를 너무 사랑해서 그래.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니 잘 살았으면 좋겠고, 그러다 보니 자꾸 간섭하게 되는 거야.”

 “저도 잘 사는 거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러니까 조금만 지켜봐 달라는데 아버지가 그걸 못 하시잖아요. 사실 저도 아이가 생길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말은 안 해서 그렇지, 저도 두렵고 막막해요. 그렇지만 저번에 형이 말한 것처럼 남들보다 조금 일찍 가정을 꾸릴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하고 내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생각이에요.”

 “난 가끔 네가 그런 말 할 때면 내가 동생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만약 내가 네 입장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면 너처럼 의젓하게 행동하지는 못했을 것 같거든. 아무튼 넌 대단해. 그러니까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작은아버지한테도 네 속마음을 털어놓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작은아버지도 너를 이해해 주실 거야.” 

 “지금 당장은 아버지가 저 좀 내버려뒀으면 좋겠어요. 자꾸 아버지가 이래라저래라하시면 제가 더 불안해진다니까요.”

 “무슨 말인지 알아. 나도 작은아버지한테 말씀드릴 테니까 너도 기회 봐서 직접 말씀드려 봐. 그건 그렇고 햄버거 가게에서는 일할만하니?”

 “마음이 불편해서 그렇지, 몸은 편해요. 불경기라 식당 문 닫는 데가 워낙 많아서 요리하는 일자리가 잘 안 나오더라고요. 어쩔 수가 없어서 당분간은 햄버거 가게에서 일하고 있는데, 안정적인 일자리가 아니라서 계속 알아보고 있어요.”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성실하게 하다 보면 또 기회가 올 거야. 나도 오가면서 괜찮은 자리가 있는지 알아볼게.”

 “고마워요, 형.”

 “언제 슬기 쉬는 날 밥이나 같이 먹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생각해 둬.”

 “그러자고 말하면 슬기가 좋아하겠네요. 고마워요. 제가 형 아니었으면 진작 여기 떴을 거예요. 헤헤헤.”

 준석이 발그레한 얼굴로 웃었다. 

 “근데 네 얼굴만 보면 맥주 한 상자쯤 마신 줄 알겠다. 맥주 한 캔에 얼굴이 그렇게 붉어지냐?”

 “그래서 슬기가 저보고 술을 혼자 다 마셨냐고 놀리잖아요.”

 “네가 작은아버지를 닮아서 그래. 그러고 보면 너랑 작은아버지가 성격만 닮은 게 아니라니까. 하하하.”

 재하가 웃자, 준석이 “그거 칭찬 맞아요?” 하면서 따라 웃었다. 

 그날 밤 준석은 재하의 집에서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 곧장 햄버거 가게로 출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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