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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 Oct 01. 2024

제10화 마음이 따뜻한 사람

 선영이 탄 마을버스가 도착한 구례 터미널 주위로 서서히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선영은 서둘러 근처에 있는 K마트로 향했다. 선영이 K마트에 온 건 처음이었다. 마트는 생각보다 꽤 컸다. 손님은 열댓 명 남짓 있었고, K마트라고 인쇄된 연두색 조끼를 입은 계산원이 선영을 보더니 “어서 오세요.” 하며 생긋 웃었다.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에 답한 선영은 입구 벽면에 세워진 카트 하나를 밀고 다니며 필요한 물건을 빠르게 담았다. 국 끓일 때 넣을 두부와 채소, 그리고 아침에 먹을 우유 한 팩과 시리얼 한 봉지가 전부였다. 선영은 들어간 지 채 10분도 되지 않아 카트에 있는 물건을 계산대에 올렸다. 

 “손님, 마일리지 카드 번호를 알려주시겠어요?”

 사십 대로 보이는 계산원이 바코드를 찍으면서 말했다.

 “아, 저는 마일리지 카드가 없어요.”

 “네, 손님. 그럼 포인트 적립 없이 계산하겠습니다.”

 선영이 신용카드를 계산원에게 건네자, 계산원이 숙련된 동작으로 계산을 끝내고 카드와 영수증을 돌려주었다.

 “저희 마트에서는 사신 물건이 많으면 배달도 해드려요. 바쁘시면 전화로 주문하셔도 되고요.”
 “집이 멀어도 배달이 되나요?”

 “군내에는 어디든지요.”
 “그럼, 배달료가 추가되나요?”

 “아니요. 저희 사장님이 무료로 배달해 드리는 거예요.”

 “좋은 일 하시네요. 다음에 양이 많으면 부탁드려야겠어요.”

 “그러세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선영은 계산원이 계산한 물건을 담아준 누런 종이봉투를 품에 안고 마트에서 나왔다. 나오면서 생각해 보니 펜션으로 돌아가 밥하고 국을 끓여서 먹으면 시간이 너무 늦을 것 같았다. 오늘 저녁은 간단하게 김밥이나 샌드위치로 해결할까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마을버스 정류장 옆에 있는 편의점이 눈에 들어왔다. 선영은 편의점으로 들어가 김밥 한 줄을 샀다. 그런 다음 마을버스 정류장 벤치에 봉투를 내려놓고 버스를 기다렸다. 주변 가게 간판에 하나둘 불이 들어왔고 도로를 오가는 자동차에도 전조등이 켜졌다. 선영은 더 어두워지기 전에 택시를 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길 건너편 터미널 앞에 빈 택시가 줄줄이 서 있었다. 선영은 봉투를 다시 들어 품에 안고 횡단보도를 향해 걸었다. 

 그때 선영의 앞쪽에서 흰 SUV 한 대가 오른쪽 지시등을 켜고 길가에 멈췄다. 곧이어 조수석 창문이 내려지더니 진돗개 한 마리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멍멍 짖었다. 운전자가 개를 쓰다듬으며 “진순아, 짖지 마. 착하지.” 했다. 운전자는 재하였다.

 걷고 있던 선영은 불현듯 우렁차게 짖는 멍멍 소리에 놀라 걸음을 멈칫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때 운전석에 있던 재하가 손을 흔들며 “팀장님!” 하면서 활짝 웃었다. 

 “어머, 작가님. 여기서 또 보네요.”

 선영이 미소를 지으며 꾸벅 고개를 숙이자, 재하가 차에서 내려 선영에게 다가왔다.

 “볼 일이 있어 나왔다가 팀장님인 것 같아서 멈췄어요. 장 보셨나 보네요.”

 재하는 선영이 품에 안은 종이봉투를 보고 말했다. 

 “네. 마트에 왔다가 택시 타고 들어가려던 참이었어요.”

 “아, 잘됐네요. 저도 집에 들어가는 길이니까 같이 가면 되겠네요.”

 재하는 선영이 안고 있는 종이봉투를 덥석 빼앗아 들었다. 

 “아이고, 제가 들어도 되는데, 그럼, 신세 좀 질게요, 작가님.”

 재하가 조수석 문을 열고 진순이를 뒷좌석으로 보내고 물티슈를 꺼내 자리를 닦았다.

 “개를 키우시나 봐요. 혹시 진돗개 아닌가요?”

 선영이 뒷좌석으로 옮겨간 진순이를 보고 말했다.

 “네, 태어난 지 1년 된 제 반려견이에요. 이름은 진순이고요.

 ”진순이요? 정겨운 이름이네요.”

 선영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진순이에게 “안녕, 진순아. 반가워.”라고 말하며 활짝 웃었다.

 “하하하, 진순이도 꼬리를 흔드는 걸 보니 어지간히 좋은가 보네요.”

 재하가 뒷좌석에 선영의 봉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머, 진순아, 고마워.”

 선영이 호호 웃었다. 

 “자, 팀장님, 타세요.”

 금세 재하가 조수석 문을 잡고 서 있었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가는 길인데 신세는요.”

 선영이 조수석에 타자 재하가 문을 닫고 앞쪽으로 돌아 운전석에 올랐다.


 잠시 후 재하와 선영이 탄 SUV가 전조등을 밝히고 어둠이 내려앉은 한적한 시골길을 달렸다. 

 “장 보러 일부러 나가신 거예요?”

 재하가 선영에게 물었다. 

 “병원에 갔다가 잠깐 들른 거예요.”
 “병원에요? 팀장님이 어디 아픈 거예요?”
 “제가 아니라 고모가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어서요.”
 “아이고, 저런, 어디가 편찮으신 거예요?”
 “넘어지셨다는데 수술은 잘됐고 지금은 요양병원에서 회복 중이세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팀장님 걱정할까 봐 안 알리셨나 보네요. 빨리 좋아지셔야 할 텐데요.”

 “다행히 지금은 걷는 연습할 정도로 좋아지셨더라고요.”
 “다행이네요.”
  그때 뒷좌석에 있던 진순이 멍멍 짖었다. 

 “집에 다 왔다고? 그래 알았어, 진순아.” 

 재하가 룸미러로 진순이를 일견하고 말했다. 

 “집이 가까워지니까 진순이가 좋은가 봐요.”

 선영이 진순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진순이가 집을 아주 잘 찾아요. 한번은 오늘처럼 마트에 데려갔었는데, 어느 순간 진순이가 사라져서 찾느라 고생한 적이 있었어요.”

 “어머나, 놀랐겠어요.”
 “말도 마세요. 진순이 찾느라 진땀깨나 흘렸으니까요.”
 “그럼, 어디서 진순이를 찾으신 거예요?”

 “아무리 찾아도 못 찾고 누가 데려갔다고 생각하고 축 처져서 집으로 왔어요. 그런데 제 차를 보고 진순이가 집에서 뛰어나오는 거예요. 그때 얼마나 반갑던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나더라니까요.”

 “그래서 반려견이라고 하나 봐요. 아무튼 그때 찾아서 다행이지, 큰일 날뻔했네요.”

 “여기 내려와 살면서 진순이가 얼마나 의지가 되는지 몰라요.”

 “그럴 것 같아요. 펜션에도 개 한 마리 있으면 고모한테 의지가 되겠죠?”

 선영이 재하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물론이죠. 엄청 든든하실 거예요. 펜션 부지가 워낙 넓어서 둘러보는 데도 시간이 꽤 걸릴 텐데, 개 한 마리 기르면 혼자 알아서 지키니까요.”

 “그렇겠네요. 나중에 고모랑 의논해 봐야겠어요.” 

 “만약 개를 기르실 것 같으면 제가 한 마리 구해드릴 수 있어요.”

 “어머, 정말요?”

 “그럼요. 저희 작은집에 진돗개가 몇 마리 되거든요. 진순이도 거기서 데려왔어요.”
 “아, 그러셨구나. 그래도 모르는 사람한테 개를 내주실까요?”

 “꼭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흔쾌히 주실 거예요. 조금 전에 팀장님이 가셨던 마트 있죠.”

 “네. 마트가 꽤 크던데요.”

 “아마 구례에서는 제일 클 거예요. 거기가 제 작은아버지가 운영하시는 마트예요. 개들은 마트 뒤쪽에 있고요.”
 “아, 그랬구나. 그럼, 고모랑 의논해 보고 작가님에게 말씀드릴게요. 고맙습니다, 작가님.”

 “별말씀을요. 헤헤.”

 선영은 선뜻 개를 구해주겠다는 재하가 고마웠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재하는 마음이 참 따뜻한 사람 같았다.     

 잠시 후 재하의 차가 거북이 펜션 후문 앞에 멈췄다. 펜션에 불이 켜지지 않아 어두웠다. 재하는 짐을 들고 펜션까지 선영을 따라 들어갔다. 선영도 혼자였다면 무서웠을 터였다. 진순이는 어둠 속으로 먼저 뛰어 들어가 멍멍 짖었다. 선영은 진순이 짖는 소리를 들으며 별관으로 들어가 불을 켰다. 재하는 짐을 내려놓고 진순이와 함께 펜션 부지를 한 바퀴 둘러봤다. 

 “들어와서 차 한 잔 드시겠어요?”

 선영이 별관 현관에 들어선 재하에게 말했다. 
 “그럴까요. 근데 혼자 있어도 괜찮으시겠어요?”

 재하는 이 넓은 펜션에 혼자 있을 선영이 걱정되었다.

 “고모 없이 있는 건 처음이긴 한데, 그래도 괜찮아요. 가까운 곳에 펜션을 관리해 주시는 분들이 사시거든요.”
 “그렇구나.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지 저한테 연락하세요. 언덕 넘어서 오면 금방이거든요.”

 “어? 뒤쪽 언덕으로 오가는 길이 있어요?”

 “네, 작은 오솔길이 나 있어요.”

 “아, 그렇구나. 저도 언제 한번 그쪽으로 가봐야겠어요.”

 선영이 차 한잔을 재하가 있는 거실로 가져왔다. 

 “앉아서 드세요. 캐모마일차예요.”

 캐모마일 향이 향긋했다.

 “향이 좋은데요. 팀장님은 안 드세요?”

 “아, 저는 밥 먹고 나서 마시게요.”

 “아직 식사 안 하셨으면 배고프실 텐데, 지금 드시지 그러세요.”

 “그럼, 그럴까요.” 

 선영은 마트 봉투에서 알루미늄 포일로 싼 김밥을 꺼내 접시에 담고 우유를 유리잔에 따라 거실로 가져왔다. 

 “작가님도 좀 드세요.”

 선영이 젓가락을 재하에게 건넸다.

 “아니요. 저는 작은집에서 먹었어요. 시장하실 텐데 어서 드세요.”

 “아, 네. 그럼 저는 먹을게요.”

 선영이 젓가락으로 김밥을 집어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입에 밥이 들어가자 배고팠던 게 느껴졌다. 오후에 펜션에 도착해 미자가 병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가슴을 졸이며 병원으로 갔던 게 생각났다. 미자를 직접 본 후에는 놀란 가슴이 가라앉았지만, 그래도 물 한 잔 마실 생각을 못 했다. 선영은 일순 재하 앞에서 너무 허겁지겁 먹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멈칫했다.

 재하는 거실 창문으로 진순이를 내다보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선영은 재하가 사람을 편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재하와 진순이가 탄 차가 내보내는 전조등 불빛이 어둠을 가르며 거북이 펜션에서 멀어졌다. 선영은 정문까지 나가서 재하의 차 불빛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걸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혼자 있어도 언제든지 연락하라던 재하의 말이 떠올라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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