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오전 열한 시경 선영은 펜션 후문에서 언덕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걸었다. 언덕 위 이팝나무를 지나 재하의 집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언덕을 오르면서 왼쪽 아래에 펼쳐진 펜션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오르자 넓은 펜션이 한눈에 들어왔다. 언덕에서 환하게 불 켜진 펜션을 내려다보면 마치 우주선이 내려앉은 것 같다는 재하의 말이 떠올랐다. 재하 덕분에 밤에 불이 들어오면 펜션이 어떤 모습일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때 앞쪽에서 선영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팀장님, 여기요.”
선영이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팝나무 아래에서 재하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작가님이 먼저 오셨네요.”
선영도 반갑게 손을 흔들며 재하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진순이는 안 보이네요.”
선영이 재하 뒤쪽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 진순이는 집에 있어요. 금방 내려갈 거라 일부러 안 데리고 왔어요.”
“아, 네.”
“내려가기 전에 여기 이팝나무를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찍어드릴게요.”
재하가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아, 그럴까요.”
선영은 그 자리에 서서 재하가 휴대전화 화면을 들여다보며 뒷걸음질 치는 모습을 바라봤다.
“여기가 좋겠어요. 자, 찍을게요.”
재하가 걸음을 멈추고 선영에게 말했다. 선영은 재하의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하나, 둘, 셋! 한 번 더 찍을게요. 하나, 둘, 셋! 이제 됐어요. 하하.”
재하가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선영에게 다가왔다.
“사진이 잘 나왔어요. 이팝나무랑 팀장님도 잘 어울리고요. 제가 지금 사진 전송해 드릴게요.”
“네, 고마워요.”
재하는 몇 번의 터치로 선영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선영은 곧장 자기 휴대전화로 사진을 확인했다.
“어머, 정말 사진이 잘 나왔네요. 맘에 들어요, 작가님.”
“다행이에요. 아 참, 팀장님은 여기서 잠시만 그대로 서 있으세요.”
“네?”
선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몇 발짝 멀어지는 재하를 바라봤다. 재하는 선영에게서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휴대전화를 들었다. 셀카를 찍으려는 걸 안 선영이 이제야 알았다는 듯 웃었다. 화면 속 재하 뒤로 환하게 웃는 선영이 나타나자, 재하도 웃으며 버튼을 눌렀다. 재하는 곧장 화면을 확인하고 그 사진도 선영에게 전송했다. 선영은 그 사진도 맘에 들었다.
선영이 재하와 함께 재하 집 마당에 들어서자, 진순이가 반갑게 짖으며 재하에게 달려왔다. 재하가 “그래, 진순아, 착하지. 놀고 있어.” 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진순이는 꼬리를 흔들며 재하 뒤에 있던 선영에게 다가왔다. 선영이 진순이를 좋아한다는 걸 진순이도 안다는 듯이 선영을 반겼다. 선영은 그런 진순이를 쓰다듬으면서 활짝 웃었다.
“팀장님, 안으로 들어오세요.”
안으로 들어갔던 재하가 현관으로 다시 나와 선영에게 말했다. 선영은 현관으로 가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담장 대신에 마당 끝을 따라 빨랫줄처럼 길게 늘어진 전등들이 인상적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봤을 때는 집이 아담하게 보였다. 하지만 직접 와서 보니 집이 꽤 컸다. 재하의 말처럼 한옥 틀만 살린 현대식 집이었다.
현관 안으로 들어가자 곧장 넓은 거실이 나왔다. 커다란 창이 내다보이는 곳에 기다란 목조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노트북과 책들이 놓여있는 걸 보니 재하가 그곳에서 작업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벽 쪽으로 소파가 마주 보고 놓여있었고, 맞은편에는 월넛 계열의 붙박이장과 싱크대가 설치된 주방이 보였다. 마치 신축 아파트 견본 주택에서 봤음 직한 주방처럼 매우 깔끔했다. 주방에서 건물 끝까지 길게 이어진 복도가 있었고 그곳에 침실과 욕실이 있었다.
“실내가 반전이네요.”
선영이 집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렇죠. 집이 워낙 오래돼서 다시 짓다시피 한 거라 편리하게 구조를 바꾼 거예요. 팀장님, 이쪽으로 와서 밀크티 한 잔 드세요.”
재하가 목조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 잘 마실게요, 작가님.”
선영이 자리에 앉아서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음, 달콤해서 좋아요. 작가님도 드세요.”
“그럴까요.”
재하도 밀크티가 담긴 찻잔을 들고 선영의 맞은편에 앉았다.
“작가님은 여기에 앉아서 작업하시면 글이 잘 써질 것 같아요. 고개만 들면 멀리 섬진강 줄기까지 내다보이고 정말 멋지네요.”
선영은 넓은 창으로 내다보이는 경치에 감탄했다.
“집이 조금 높은 데 있어서 좋은 점 중 하나가 멋진 경치가 덤으로 주어진다는 거예요. 어렸을 때는 좋은지 몰랐는데 지금은 오히려 집이 높은 곳에 있어서 좋더라고요.”
재하도 몸을 돌려 앞에 펼쳐진 경치를 보며 말했다.
저 멀리 정류장에서 마을버스가 한 남자를 내려주고 거북이 펜션 쪽으로 출발했다. 그 남자는 길을 건너 재하 집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걸어 들어왔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재하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준석이네.”
“아는 사람인가 봐요.”
선영도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 사촌 동생이에요. 그러니까 진돗개 기른다는 작은집 아들이에요.”
“아, K마트요?”
“네, 맞아요. 서울에서 요리사로 일하다가 지금은 사정이 있어서 햄버거 가게에서 일하고 있어요.”
“오, 그래요? 저는 남자 요리사라고 하면 왠지 근사하게 보이더라고요.”
“고등학교 때부터 요리를 배우더니 양식 조리기능사 자격증을 따더라고요. 작은아버지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지만 준석이는 자기 주관대로 서울로 올라가 요리사로 일하면서 1년 넘게 잘 살았어요. 그런데 이곳에 책임질 일이 생겨서 다시 구례로 내려와 살고 있어요. 준석이가 저랑 열두 살 차이가 나는데 혼자 하나하나 헤쳐 나가는 거 보면 기특해요.”
“제가 듣기에도 대단해 보이네요. 근데 제가 있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별말씀을요. 어린 동생이라 생각하고 편하게 계세요. 아마 오늘 쉬는 날이라 오나 봐요.”
준석이 마당에 들어서자, 재하가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어서 와라. 오늘 쉬는 날이니?”
“네, 형. 형이랑 밥 먹고 나중에 슬기 만나러 가려고요.”
“그래? 때마침 잘 왔다.”
재하는 밥 먹으러 왔다는 준석의 말에 씩 웃었다. 준석이 요리한 파스타와 샐러드를 선영에게 대접하면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잠시 후 준석은 선영과 인사를 나눈 후 곧장 재하에게 이끌려 주방에서 요리를 시작했고, 선영은 두 남자가 다정하게 요리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봤다. 재하가 재료를 준비해 놓은 덕에 준석은 제법 빠르게 요리를 끝냈다.
“이야, 레스토랑에 와 있는 기분이네요.”
선영이 식탁에 차려진 파스타와 샐러드를 보며 말했다.
“면은 넉넉히 삶았으니까 많이 드세요.”
준석이 앉으며 말했다.
“팀장님, 드세요.”
재하도 준석 옆에 앉으며 말했다.
“네, 잘 먹을게요.”
선영이 포크로 면을 돌돌 말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맛있었다.
“음, 맛있어요. 역시 요리사가 한 거라 다르네요.”
선영의 칭찬에 준석이 히죽히죽 웃으며 좋아했다.
“다행이에요. 헤헤. 많이 드세요.”
“음, 맛있다, 준석아. 다음에도 종종 부탁한다.”
재하가 대견하다는 듯이 준석을 바라보며 웃었다.
“언제든지 말만 해요. 와서 후딱 만들어 줄게요.”
준석은 자기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 두 사람이 고마웠다.
식사를 마치고 선영과 준석이 설거지를 하려 하자 재하가 설거지는 자기 담당이라면서 말렸다. 그래서 준석은 커피를 내렸다. 재하가 설거지를 마치자 세 사람은 마당 한쪽에 나란히 놓인 나무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한참 뒤 선영이 일어서며 말했다.
“오늘 여기 와서 점심도 맛있게 먹고 고소한 커피도 마시고 가네요. 준석 씨, 다음에 저희 펜션에 한번 놀러 와요. 그땐 제가 대접할게요.”
“아, 네, 그럴게요. 고맙습니다.”
“팀장님, 이따가 병원에 가실 거예요?”
재하가 선영에게 물었다.
“네, 펜션에 들렀다가 곧장 고모한테 가려고요.”
“그럼, 제 차로 가요. 안 그래도 준석이 데려다주러 나가야 하거든요.”
“그래요? 그럼 그럴까요.”
“잠시만 계세요. 금방 정리하고 나올게요.”
재하가 커피잔을 모아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선영과 준석은 마당에서 테니스공을 가지고 놀고 있는 진순이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