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영과 준석은 재하의 차로 가다가 준석이 먼저 슬기를 만나기로 한 곳 부근에서 내렸다. 잠시 뒤 재하와 선영이 탄 차는 미자가 입원한 병원에 도착했다. 선영은 재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려 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재하는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만 있을 뿐 브레이크에서 발을 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선영에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우측 창문을 내렸다.
“혹시 저도 같이 올라가서 펜션 사장님께 인사드려도 될까요? 이웃이 많은 것도 아닌데 따로 병문안은 못 올망정 여기까지 왔는데 인사도 안 드리고 가는 게 영 마음에 걸려서요. 이사 막 왔을 때 찾아 뵙고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선뜻 그러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재하는 일찍 인사드리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한 손으로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선영은 그런 재하가 마음이 따뜻하게 느껴져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무엇보다 재하가 먼저 미자에게 인사하겠다고 말해줘서 고마웠다. 선영은 자신이 서울로 돌아가도 재하와 미자가 이웃사촌으로 잘 지냈으며 하고 바라고 있었다.
“그래 주시면 저야 고맙죠. 작가님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올라가요.”
“저는 시간이 너무 많아서 탈이라니까요. 하하하.”
재하가 창문을 올리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선영도 같이 웃었다.
선영이 재하를 데리고 병실에 들어가자 입원 환자들의 눈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쏠렸다. 선영은 환자들에게 인사를 꾸벅하고 미자에게 다가갔다. 재하도 선영을 따라 환자들과 눈을 맞추며 인사했다.
“오지 말고 그냥 집에서 쉬라니까는 말 안 듣고 또 왔네. 근데 누구……?”
미자는 선영의 뒤에 서 있는 스포츠머리에 키가 훤칠한 재하에게 시선을 두고 말했다.
“아, 고모, 여기는 어제 말씀드렸던 그 작가님이에요.”
“아이고, 반가워요. 집 공사할 때부터 누가 사나 궁금했는데 드디어 오늘 보게 되네요.”
미자는 활짝 웃으며 재하를 반겼다.
“처음 뵙겠습니다. 신재하라고 합니다. 진즉 찾아뵀어야 하는데 이제야 인사드리게 되었네요. 죄송합니다.”
“죄송하긴요. 저도 주변머리가 없어서 궁금해하기만 했지, 먼저 찾아가 볼 생각을 못 했어요. 장소가 그렇긴 하지만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가워요.”
“퇴원하시면 자주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언제든지 놀러 와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그래요. 아 참, 펜션에서 기를 개도 알아봐 줄 거라고 들었는데,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작은집에서 진돗개를 기르고 있어서요. 헤헤. 조만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여기 대접할 게 없어서 어쩌지요? 선영아, 작가님에게 커피라도 뽑아 드려라.”
“아니 괜찮습니다. 조금 전에 집에서 마시고 왔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가고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아이고, 서운해서 어쩌나. 그럼, 다음에 펜션으로 놀러 와요.”
“네. 몸조리 잘하시고요.”
재하는 나오면서 다른 환자들에게도 눈인사를 건넸다.
“조카사위 될 사람인가 보네. 키도 크고 인물도 훤하게 잘생겼네. 좋겠구먼.”
건너편 침대에 앉아 있던 여든 넘은 노인이 문을 열고 나가는 재하를 보면서 말했다. 재하는 그 말을 듣고 귀가 달아올랐다. 하지만 일부러 못 들은 척 그대로 병실 밖으로 나왔다. 그때 미자가 “조카사위가 아니라 이웃사촌이에요, 할머니.” 하고 큰 소리로 말하며 웃었다. 건너편 노인은 귀가 어두웠다. 재하 뒤에 나가던 선영도 얼굴이 붉어졌다.
재하와 선영은 둘 다 쑥스러워 말없이 1층 로비까지 내려왔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작가님.”
선영은 어색한 게 느껴져 일부러 웃으며 말했다.
“그만, 들어가 보세요, 팀장님. 그럼 또 봐요.”
재하도 선영을 따라 웃으며 돌아섰다.
선영이 2층으로 올라왔을 때 미자가 보행기를 붙잡고 병실 밖에 나와 있었다.
“고모, 걷기 연습하시게요?”
선영은 미자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그래, 우리 잠깐 정원에 나갈래?”
“그래요, 고모.”
미자와 선영은 건물 뒤편 정원에 나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미자는 한참 동안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망설이기를 반복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어제 휴대전화를 찾아왔는데 부재중 전화가 많더구나. 그중에 주호가 한 것도 있고.”
“오빠가 고모한테 안부 전화했을 거예요.”
선영은 자신과 주호 사이의 일을 미자가 알게 될까 봐 지레 놀라 재빨리 둘러댔다.
“선영아, 그러지 않아도 돼. 주호랑 통화했어.”
선영은 미자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것에 대해 미자에게 언젠가는 알려야 되겠지만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만은 피하고 싶었다. 선영은 어린 조카 딸을 돌보기 위해 수녀가 되는 것도 포기한 미자에게 잘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지도 못하고 이렇게 걱정만 안겼으니 너무 속상했다. 선영은 미자에게 너무 미안해서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미자가 그런 선영의 손을 잡고 토닥였다.
“여기서 살고 싶다는 네 말이 좋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되더구나. 그러던 참에 주호한테 온 부재중 전화를 보고 무슨 일이 있구나, 했다. 주호가 내 안부가 궁금해서 전화했다면 내 휴대전화 전원이 꺼져있더라고 너한테 말했을 텐데 너는 아무 말이 없었지. 그래서 내가 주호한테 전화한 거란다. 주호는 내가 다 알고 있는 줄 알고 있더구나.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하지 그랬어? 내가 해줄 건 없어도 나한테 털어놓기라도 하면 마음이라도 가벼웠을 텐데. 혼자 누구한테 말도 못 하고 얼마나 속상하고 얼마나 아팠겠니.”
미자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선영의 어깨도 들썩였다. 미자가 다른 한 손으로 선영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래, 우리 오늘만 울자. 울고 싶을 때 울지 못하는 것만큼 속상한 것도 없더라. 그리고 오늘 이후로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잊어버리자. 주호가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빌더구나. 그래서 선영이가 없던 일로 하겠다고 해도 내가 틀어 말릴 거라고 하면서 죽어도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
“이런 모습을 보여드리게 돼서 죄송해요, 고모.”
“선영이 네가 죄송해할 것 없어. 그런 짓을 한 사람이 나쁜 거지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래. 살면서 좋은 일만 있으면 좋은데, 그게 우리 마음대로 되니?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라고 생각하자.”
“고모한테는 잘사는 모습만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쉽게 입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나도 네 마음 잘 안다. 하지만 세상에 가족이라고는 너랑 나랑 둘뿐인데 말 못 할 일이 뭐가 있겠니?”
“고마워요, 고모.”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는 여기 있으면서 차차 생각해 보자. 여기서 나랑 같이 지내면서 펜션을 운영해도 좋고 아니면 다시 출판사를 차려도 되니까. 그러고 보니 일전에 현정이가 말한 것처럼 책방을 차려도 좋고 말이야. 할 건 많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지금은 잘 쉬자.”
“그럴게요, 고모.”
선영은 미자의 말을 듣고 한동안 가슴을 짓눌렀던 돌덩이를 마침내 내려놓은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미자의 말대로 여기서도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 서울에서 내려올 때는 당분간 여기서 지내다 다시 올라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쉬면서 생각하다 보면 자신이 무얼 하는 게 좋을지 떠오를 거라 믿었다. 이럴 때 고모가 옆에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선영도 고모에게 의지가 되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