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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 Oct 01. 2024

제17화 북스테이

 주말 오전 선영은 본관 중앙에 있는 휴게실에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다. 휴게실은 투숙객들이 식사하거나 커피나 차를 마시면서 쉴 수 있는 공간이다. 한쪽에는 음식을 준비하고 빵을 굽는 주방이 있고, 한가운데에는 열댓 명이 앉을 수 있는 기다란 식탁이 놓여있다. 복도 쪽에는 커피머신과 정수기가 설치되어 있다. 선영은 창문으로 정원 분수대가 내다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다. 선영이 흥미롭게 읽고 있는 책은 현정의 남편 수창이 운영하는 독립출판사의 신간이다. 구례로 내려오는 고속열차 안에서 읽으려다 재하를 만나 이야기하느라 읽지 못했다. 

 제목은 『그래 월세는 낼 수 있고?』다. 제목부터 웃프다. 한 대기업 퇴사자가 동네서점 겸 카페를 운영하면서 겪는 여러 에피소드를 코믹하게 그리고 있는 책이다. 시중 서점과 온라인 서점에 유통하는 일반 출판물과는 달리 독립출판물은 주로 독립서점이나 북 페어를 통해 유통된다. 그렇다 보니 독립출판 운영자가 전국에 있는 독립서점에 책을 진열하기 위해서는 일일이 전화를 돌려야 하고 발품을 팔아야 한다. 선영은 녹록지 않은 독립출판사의 사정을 알기에 수창이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책이 나오면 여러 권을 사서 주위에 돌린다. 

 이 책의 저자는 수창이 자주 가는 동네서점 사장이다. 수창은 이력이 특이한 서점 사장과 이야기하면 할수록 재미가 있어서 사장에게 책을 내보자고 제안해 책을 내게 되었다. 저자는 삼십 대 중반으로 아직 미혼이다. 저자의 어머니가 결혼도 안 하고 잘 다니던 대기업을 하루아침에 퇴사한 아들이 손님도 올 것 같지 않은 동네에 카페가 딸린 서점을 차린다는 말을 듣고 한숨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사서 고생을 자처하는 아들이 걱정되기도 하고 한심스럽기도 한 어머니의 짠한 마음이 책 제목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렇다고 너무 슬프거나 우울한 내용은 아니다. 선영은 책을 읽는 내내 눈가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많이 웃었다. 비록 돈은 못 벌어도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지금이 행복하다는 저자의 긍정적이고 코믹한 일상이 독자의 웃음 코드를 끊임없이 건드렸다. 그러면서도 어려운 현실 속에서 자신이 선택한 삶을 묵묵히 헤쳐 나가는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책이다. 그러던 중 선영은 문득 여기서 책방과 카페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선영은 책을 식탁에 내려놓고 쪽매널 마루가 길게 이어진 복도로 나갔다. 휴게실 오른쪽은 미자가 다도와 명상 수업을 하는 교실이다. 휴게실과 체험 교실 그리고 비품실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은 모두 객실이다. 선영은 건물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길게 이어지는 복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에 창문을 가리지 않고 길게 서가를 꾸미면 어떨지 생각했다. 서가를 꾸며도 복도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게 아니라서 좋을 것 같았다. 선영은 그런 생각을 하며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오른쪽 복도 끝 출구로 나온 선영은 친숙한 소리를 듣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진순이가 짖는 소리였다. 진순이 옆에는 재하도 있을 터였다. 언덕 쪽으로 눈을 돌리자, 재하와 진순이 내려오고 있었다. 재하는 선영을 보지 못했다. 

 “작가님! 진순아!”

 선영이 큰 소리로 불렀다. 진순이가 먼저 멍멍 짖었고 뒤이어 재하가 소리를 찾아 시선을 돌렸다. 

 “팀장님, 거기 계셨네요.”

 재하가 선영을 보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쪽으로 오세요.”

 선영이 손을 쳤다.

 “네, 그럴게요.”

 대답을 끝낸 재하는 빠른 걸음으로 후문 쪽으로 내려갔다.      


 잠시 후 선영은 재하에게 본관을 구경시켜 준다. 재하는 옛날에 교실, 교무실, 실험실이었던 곳이 깔끔한 객실과 휴게실로 변해있는 걸 보고 감회가 새롭다.

 본관을 다 둘러본 재하와 선영은 휴게실로 돌아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안 그래도 내부가 어떻게 변했는지 한번 보고 싶었어요.”

 “그러실 것 같아서 작가님에게 언제 한번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예전에 비해 많이 변했죠?”

 “복도만 그대로고 나머지는 많이 바뀌었네요. 본관 앞쪽 창문을 모두 통유리로 바꿔서 그런지 실내가 아늑하네요. 예전에는 교실 창문 사이로 바람이 많이 들어왔거든요.”
 “옛날 창문은 추억을 회상하기에는 좋은데 객실에는 부적절하다고 해서 앞쪽은 통유리로 바꾸고 뒤쪽은 창틀만 보완하고 창문은 그대로 둔 거예요.”

 “숙소도 아늑하게 잘 꾸며져 있어서 조용히 쉬러 오는 사람들에게는 좋겠더라고요.”

 “작가님 말씀대로 쉬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가족 단위 손님보다는 혼자 오는 손님들이 많은가 봐요.”

 “다시 펜션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보통 이런 데는 단골이 있기 마련이거든요.”

 “맞아요. 고모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손님들이 있다고 들었어요. 한두 달 쉬었다가 여름에 다시 열 생각인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그러면 팀장님은 언제 서울로 돌아가시는 거예요?”

 “안 그래도 작가님에게 말씀드릴 생각이었는데 말이 나온 김에 지금 말씀드려야겠네요.”

 선영의 말에 재하는 눈이 커진 채로 선영에게 귀를 기울였다.

 “사실은 저 출판사 그만뒀어요.”

 “네? 팀장님이 설립한 출판사라고 알고 있었는데요.”

 “그건 맞는데, 저는 실무만 맡았을 뿐이고 출판사는 제 소유가 아니에요.”

 “아, 그러셨구나.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동안 키워온 출판사를 떠나시게 돼서 무척 서운하시겠어요.”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면 거짓말일 거예요. 그래도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보람이 컸고 좋은 추억도 많아서 후회가 남지 않아서 좋아요. 그래서 말인데 작가님은 저와 상관없이 다음에 낼 책도 지난번처럼 똑같이 하시면 돼요. 편집팀에 연락하면 좋아할 거예요.”

 “싫어요.”

 “네? 싫다니요?”

 “그게 아니라. 저는 팀장님 아니면 그 출판사에서 책을 낼 이유가 없어요. 팀장님이 아니었다면 책을 낼 생각도 못 했을 테니까요.”

 “그래도 작가님 책을 다른 출판사에서 내는 것보다는 두 번이나 작업했던 출판사가 편하지 않겠어요?”
 “저는 다른 출판사에서 책 낼 생각은 없어요. 그냥 기다렸다가 팀장님과 출간 작업하고 싶어요.”

 “말씀은 고맙지만 기존 출판사에서 책을 내야 작가님에게 조금이라도 더 이익이 돌아가요. 저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요.”

 “그래도 저는 기다릴게요. 저는 시간이 많은 사람이라 급할 것도 전혀 없고요. 하하하.”

 선영은 생각지도 않은 재하의 말에 감동이 밀려와 마음이 뭉클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마워요, 작가님.”

 “이번 기회에 팀장님이 직접 출판사를 차리는 건 어떨까요?”

 재하가 웃음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출판사를요?”

 “팀장님이 1인 출판사를 차리시고 제 책을 출간하면 될 것 같은데요. 출판사가 꼭 서울에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여기가 책 만드는 데에는 더 좋을 수도 있고요.”

 “어제 고모도 비슷한 이야기를 해서 저도 생각 중이에요.”

 “출판사요?”

 “출판사뿐만 아니라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더라고요. 그중 하나가 책방이에요. 서가는 복도에 꾸미면 될 것 같고요.”

 “그거 좋은 생각이에요.”

 재하가 손가락을 튀기며 딱 소리를 냈다. 

 “하하하, 좋아요?”

 “네. 펜션 투숙객들이 여기서 쉬는 동안 책도 읽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책과 휴식이라, 일종의 북스테이네요.”

 “맞아요, 북스테이! 북스테이 하기에 여기처럼 좋은 곳도 없을걸요. 팀장님은 그런 생각 안 드세요?”

 “그러네요. 음, 북스테이라,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겠는데요. 생각한 것 중에 카페도 있는데 그건 휴게실 한쪽에 차리면 될 것 같더라고요. 책방에 왔다가 카페에 들러 음료나 디저트를 먹고 가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것도 좋은 생각이에요. 여기에 별다른 편의시설이 없으니까, 카페가 있으면 바람 쐬러 오는 사람들도 많을 거예요.”

 “작가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자꾸 욕심이 생기네요.”

 “그럼, 출판사도 생각해 보세요, 팀장님.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시고요.”

 “고마워요, 작가님.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작가님 덕분에 이곳에서 지내는 며칠이 즐거웠어요. 사실 내려올 때는 그냥 쉬어야겠다는 생각만 했지, 다른 생각은 없었거든요. 그런데 기차에서 운 좋게 작가님을 만나고부터 이곳에 집중할 수 있게 됐어요. 그 덕에 며칠 아니지만 서울에서 있었던 안 좋은 일도 벌써 까마득하게 느껴지기 시작했고요.”

 “제가 도움이 됐다면 고마운 일이네요. 저번에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것도 다 팀장님 덕분이에요. 저도 팀장님의 새로운 시작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요.”

 “작가님은 이미 저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어요. ……그런데 작가님한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어떤 부탁이든지 편하게 말씀하세요.”

 “다른 게 아니라 팀장이라는 호칭을 들으면 자꾸 서울에 있는 출판사가 생각이 나서요.”

 “아, 그 생각을 못 했네요. 그러면 어쩐다?”

 재하는 곰곰 생각한다. 그러다가 문득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잇는다. 

 “서로 이름을 부르면 어떨까요? 저도 작가님이라는 말을 들으면 좀 낯 뜨거워서요.”

 “그러면 이제부터는 편하게 이름을 부르기로 할까요?”

 “좋아요. 그럼 저는 선영 씨라고 부를게요.”

 “저는 재하 씨라고 부르면 되나요?”

 “아, 네, 처음이라 어색한 건 있네요. 하하, 그래도 부르다 보면 금세 편해질 거예요.”

 “그러겠죠, 하하.” 

 선영은 앞으로 여기서 무엇을 하게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언제든지 의논할 수 있는 재하가 이웃이라서 무척 든든하고 동시에 그 일들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오늘 가장 감동적인 일은 재하가 선영을 통해 책을 내고 싶다는 말이었다. 좋지 않은 일로 출판사를 그만둔 상황에서 이보다 든든한 말이 없었다. 선영은 될 수 있으면 재하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먼저 미자와 의논해야겠지만 다른 건 몰라도 재하의 다음 책은 자기 손으로 꼭 출간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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