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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 Oct 01. 2024

제19화 여배우 그리고 호박 식혜

 영업을 시작하고 한 달쯤 지나자, 펜션을 다녀간 손님들이 소셜미디어에 사진과 리뷰를 올리면서 거북이 펜션 소셜미디어 계정에도 방문자가 많아졌다. 그뿐 아니라 복도에 기다랗게 꾸며진 서가 사진을 소셜미디어에서 보고 일부러 책방에 찾아와 책을 사고 서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늘었다. 그런 방문자는 대개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일 거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고 다른 지역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7월 말에는 소셜미디어 계정이 다운될 정도로 소셜미디어의 위력을 실감한 일이 있었다. 북스테이 손님들이 퇴실을 앞둔 평일 오전은 비교적 한가한 편이다. 책방이나 카페를 찾는 손님들은 주로 점심시간 이후에 방문했다. 그날도 네 사람은 청소를 마치고 휴게실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시간에는 보통 커피 한 잔씩 마시는 게 루틴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커피 대신 호박 식혜가 식탁에 놓였다. 미자가 요즘에 아침저녁으로 손발이 붓는다는 슬기를 위해 늙은 호박을 구해다가 식혜를 만들었다. 

 “음, 너무 맛있어요, 사장님.”
  슬기가 식혜를 한 모금 마시고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선영도 식혜 맛을 보더니 미자를 향해 엄지를 들어 올렸다. 

 “호박 식혜는 처음인데, 보통 식혜보다 훨씬 더 맛있어요.”

 준석이 식혜를 한 번에 들이켜고 빈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유리병에 담아놓았으니까 가져가서 냉장고에 넣어 놓고 슬기랑 같이 마셔.”

 미자가 식혜를 단번에 마셔버린 준석을 보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고마워요, 사장님.”

 슬기는 식혜가 담긴 유리병을 본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슬기는 바쁜 와중에도 자신을 위해 시간을 들여 호박 식혜를 만들어 준 미자가 무척 고마웠다. 부모 없이 보육원에서 자란 슬기에게는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낯선 경험이었다. 슬기는 거북이 펜션의 일원이 되고부터 임신한 자신을 세세하게 챙겨주는 미자와 선영이 친정엄마와 친언니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하고 있었다.

 “효과가 있으면 또 만들어 줄 테니까 아끼지 말고 열심히 마셔봐. 설탕을 안 넣었으니까 자주 마셔도 괜찮을 거야.”

 미자도 식혜를 맛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모, 설탕을 안 넣었는데도 이렇게 달수가 있어요?”

 선영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다시 식혜를 음미했다.

 “아마 그런 걸 비법이라고 할걸?”

 미자가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모두가 웃었다.

 “다음에 고모가 호박 식혜를 만들 때 동영상 촬영해야겠어요. 하하.”

 선영의 말에 슬기가 “그럼, 촬영은 제가 할게요, 언니.” 하면서 맞장구쳤다. 

 바로 그때 서가에 한 중년 여성이 들어섰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끼고 목에는 연두색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고 물 빠진 청바지에 흰색 반소매 티셔츠 차림이었다. 

 선영이 그녀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그녀도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답례했다. 

 “아직 다른 손님도 없으니까 저 손님한테 호박 식혜 한 잔 드시라고 해볼래?” 

 미자가 선영에게 말했다.

 “아, 네, 제가 가서 말씀드려 볼게요.”

 선영이 서가에서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 손님에게 가서 “괜찮으시면 호박 식혜 한 잔 드시겠어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호박 식혜라는 말에 반색하며 곧장 선영을 따라 휴게실로 들어왔다. 

 “여기 앉아서 편하게 드세요.”

 미자가 주방에서 크리스털 유리잔에 호박 식혜를 가득 따라 가져와 손님에게 건넸다. 

 “색깔이 참 예쁘네요. 잘 마실게요.”

 손님은 선글라스를 낀 채로 슬기 옆자리에 앉아 식혜를 한 모금 마셨다.

 “어머, 정말 맛있어요. 제가 먹어 본 식혜 중에서 최고예요.”

 “아이고, 입맛에 맞으시다니 다행이에요.”

 맞은편에 앉아 있던 미자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혹시 호박 식혜를 좀 사 갈 수 있을까요?”

 “아, 죄송해서 어쩌죠? 호박 식혜를 판매용으로 만든 게 아니라서요.”

 선영이 미자를 일견하고 손님에게 말했다. 

 “아, 그러시구나. 식혜가 너무 맛있어서 저 혼자만 마시기 미안해서요.”

 “그럼, 한두 잔 정도는 드릴 수 있어요. 사실 손발이 붓는 데에 좋다고 해서 만든 거라서요.”

 미자가 슬기를 보면서 말했다. 그러자 손님도 슬기가 임신한 걸 알고 “어머, 임신하셨네요. 축하해요.”라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슬기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몇 개월이에요?”

 “아, 이제 7개월 됐어요.”

 슬기가 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제 몇 개월 안 남았네요. 조금만 더 고생해요. 사실 저도 예전에 임신했을 때 자주 손발이 부어서 호박 끓인 물을 많이 마셨거든요. 그래서 호박 식혜라는 말을 듣고 그때 생각이 떠올라 따라 들어왔어요. 호호호.”

 “아, 그러셨구나. 호박이 효과가 있긴 있나 봐요.”

 선영의 말에 “확실히 효과가 있더라고요.”라며 손님이 말했다. 

 “저도 많이 마셔야겠어요.”

 슬기가 싱긋 웃는다.

 “그런데 저희 펜션은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미자가 손님에게 물었다.

 “아, 구례에 일이 있어서 왔다가 시간이 좀 나길래 이 근처에 가볼 만한 곳을 검색했더니 여기가 나오더라고요. 근데 여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렇게 맛있는 식혜도 마시고요.”

 “잘 오셨어요. 식혜 좀 담아놓을 테니까 나중에 가실 때 가져가세요.”

 미자가 식혜를 담으러 주방으로 가면서 말했다.

 “식혜는 임신한 사람이 마셔야죠.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많이는 아니고 한두 사람 마실 정도밖에 안 될 거예요.”

 어느새 미자는 주방에서 투명 아크릴 텀블러에 호박 식혜를 담고 있었다.

 그러자 손님은 그 모습을 보고 멈칫하더니 선글라스를 벗었다. 선영과 준석이 선글라스를 벗은 손님 얼굴을 바라봤다. 뒤이어 미자를 보고 있던 슬기가 손님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영화배우 진보라 님 아니세요?”

 그 말을 듣고 선영과 준석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 저를 한눈에 알아보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호호호.”

 보라는 선글라스를 식탁에 내려놓으며 활짝 웃었다. 보라는 중학생 때 단역으로 영화에 데뷔해 이십 대에 들어와 여러 작품에서 조연을 맡기 시작하더니 삼십 대에 들어서는 흥행을 보장하는 주연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어느덧 사십 대 중반이 된 보라는 몇 해 전에는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우수연기상을 수상함으로써 경력 30년 차 베테랑 여배우라는 걸 입증했다.

 “우와,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배우를 이렇게 가까이서 볼 줄이야. 마치 꿈만 같아요.”

 슬기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신기해했다. 선영과 준석도 유명 배우와 마주 보고 있는 이 순간이 신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유명한 분이 저희 펜션을 찾아주시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네요.”

 미자가 식혜가 담긴 아크릴 텀블러를 보라에게 건네며 말했다. 

 “맛있는 식혜까지 주시고 정말 감사해요. 이렇게 좋은 분들도 만나고 오늘 제가 운이 좋네요. 호호호.”

 “저희가 운이 좋은 거죠. 스크린에서만 보다가 이렇게 직접 보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선영이 신기한 듯 보라를 보면서 말했다.

 “사실 구례에 촬영이 있어서 며칠 와 있었거든요.”

 “그럼 촬영은 다 끝난 거예요?”

 선영이 물었다.

 “오후에 한 장면만 촬영하면 다 끝나요. 사실 오전에 촬영이 비었는데. 숙소에만 있기 뭐해서 책이나 좀 볼까 하고 혼자 여기에 온 거예요.”

 “잘 오셨어요. 혹시 시간 되시면 저희랑 점심 식사도 하고 가세요. 여기 요리사가 음식을 썩 잘하거든요.”

 선영이 준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오늘은 책만 사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대신 조만간 다시 와서 며칠 쉬었다 갈게요. 보니까 여기 북스테이도 하더라고요.”

 “그때 오시면 맛있는 거 많이 해드릴게요. 헤헤.”

 준석이 넉살 좋게 말했다.

 “기대할게요. 호호호.”

 “숙박 앱으로 예약이 안 될 수도 있으니까 언제든지 이 번호로 전화하세요, 그럼, 저희가 미리 준비해 놓을게요.”

 선영이 휴대전화 케이스에서 출판사 명함을 꺼내 보라에게 건넸다.

 “도서 출판 거북이? 어머, 출판사도 하시네요. 고마워요. 오기 전에 미리 연락할게요.”


 보라는 촬영장으로 돌아가기 전에 서가에 들러 책을 열 권 넘게 샀다. 그런 다음에 펜션 식구들과 정원에 나가 사진을 찍었다. 보라가 떠나고 슬기가 보라와 찍은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려도 될지 선영에게 물었다. 선영은 잠시 생각한 끝에 올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유명 배우가 왔다 갔다고 하면 더 많은 사람이 펜션을 방문할 터였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많으면 보라가 와서 쉬는 건 좀처럼 힘들지 싶었다. 보라가 언제든지 찾아와 쉴 수 있는 곳이 하나쯤은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거북이 펜션이 그중 하나가 되길 바랐다. 선영의 말을 듣고 슬기도 공감했다. 

 그런데 며칠 후 거북이 펜션 소셜미디어 계정이 다운되는 일이 있었다. 갑작스럽게 계정이 다운되는 바람에 소셜미디어를 담당하는 슬기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뒤늦게 그 원인이 밝혀졌다. 보라가 펜션에서 찍은 사진 몇 장이 소셜미디어에 돌아다녔고, 그 사진을 본 사람들이 일시에 거북이 펜션 계정으로 우르르 몰리면서 결국 계정이 다운된 것이다. 그 사진을 올린 사람은 바로 보라였다. 처음에 사진이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았을 때 선영은 보라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 사진들이 원래 보라의 소셜미디어 계정에 올라가 있었다는 걸 알고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보라가 일부러 펜션을 알리기 위해 사진을 올렸을 거라는 게 슬기의 추측이었다. 미자와 준석도 슬기와 같은 생각이었다. 선영은 생각할수록 보라가 고마웠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보라에게 고마움을 전할 기회가 꼭 있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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