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전 미자가 출판사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선영은 키보드를 타닥타닥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미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모, 손님들이 많으면 제가 가볼까요?”
선영은 갑자기 손님이 몰려서 미자가 선영을 부르러 왔다고 생각했다.
“그런 게 아니라…….”
미자가 말꼬리를 흐리자 선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미자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에요, 고모?”
“그래, 언젠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니까 그냥 잘됐다고 생각하련다.”
선영은 눈을 크게 뜨고 미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주호가 왔다.”
“언제요?”
“조금 전에 왔길래 내가 그냥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주호가 너를 꼭 보고 가야겠다고 하는구나. 만나서 좋을 게 있겠나 싶으면서도 그렇다고 피할 일도 아닌 것 같아서 일단 기다려 보라고 했다. 선영이 네 생각은 어떠니?”
“그러면 주호 오빠는 지금 어디 있어요?”
“운동장 관람석에 있을 거야.”
선영은 주호와 한 번은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이 그날일 줄은 몰랐다. 주호와 헤어지고 구례에 내려온 지 어느새 3개월이 넘었다. 10년 가까이 사귄 사람을 완전히 잊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새로 벌인 일에 몰입하느라 그랬는지 주호와의 일이 아주 까마득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주호가 생각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주호를 떠오르는 일이 처음처럼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두 번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일임을 받아들였다. 선영은 구례에 내려와 새롭게 시작한 지금이 행복하다. 무엇보다도 함께 일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이 좋다. 특히 재하는 선영이 출판사를 시작한 이유였다. 미자, 재하, 준석, 슬기. 진순이, 독도에 이르기까지 이 중에 누구도 선영의 삶에서 빼놓고 싶지 않다. 무슨 일을 결정할 때는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면 그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가 명확해지는 법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선영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래요, 고모. 내가 가서 만나볼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미자가 선영의 손을 잡고 토닥였다.
선영은 정원 분수대를 돌아 운동장 쪽으로 걸었다. 몇몇 손님들이 나무 그늘에 앉아 책을 읽었다. 운동장 관람석 맨 아래 칸에 앉아 있는 주호가 보였다.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를 듣고 주호가 고개를 돌렸다.
“선영아!”
주호는 선영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들었다. 선영은 아무 대답 없이 주호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네요.”
선영이 주호 옆에 앉으며 말했다.
“어, 그래, 잘 지냈지?”
주호는 주뼛거리며 선영의 옆에 앉았다.
“네, 출판사 직원들도 잘 지내죠?”
“어, 다들 잘 지내지, 뭐.”
“내가 안부 묻더라고 전해줘요.”
“그래, 그럴게.”
“그런데 여긴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에요?”
선영은 주호 대신 앞쪽 운동장 끝을 바라보며 말했다.
“연락하면 내려오지 말라고 할 것 같아서 네 얼굴 보고 이야기하지, 싶어서 무작정 내려온 거야.”
선영은 아무 말 없이 주호의 말을 들었다.
“내가 그동안 연락을 안 한 건 선영이 너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어서였어. 우리가 함께한 10년이란 세월을 한 번의 실수로 그대로 무너뜨리기엔 너무 아깝잖아. 그래서 말인데, 선영아,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안 되겠니? 앞으로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라고 맹세할게.”
“오빠, 그런 일이 있고 여기에 내려올 때만 해도 여기서 좀 쉬었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갈 생각이었어요. 올라가서 오빠 없이도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자존심 때문에라도 꼭 그러고 싶었어요. 그런데 여기에서 생각지도 않는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원래 내가 내려올 줄 알고 미리 준비해 놓은 것처럼요. 나는 그 일을 흔쾌히 받아들였어요. 오빠하고 그런 일이 없었다면 생각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운명이란 이런 거구나, 했어요. 펜션을 새롭게 단장하면서 카페, 책방, 출판사까지 준비한다고 바빴지만 그래도 힘든 줄 모르고 재미있었어요. 함께 일하는 펜션 식구들도 늘어서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해요. 제 말은 오빠에게 돌아갈 일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빠도 잘 지내기를 바랄게요.”
“선영아, 네가 원하면 출판사 명의를 네 이름으로 바꿀 수도 있어. 내 오피스텔도 네 명의로 해줄게. 선영아, 우리 이러지 말고 내 차로 드라이브 좀 하고 오자.”
“오해하지 말아요, 오빠. 난 돈 때문에 오빠를 만난 게 아니에요. 지금 한 말은 안 들은 걸로 할게요.”
선영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말을 이었다.
“난 오빠에게 할 말은 다 했으니까, 더 할 말 없으면 난 들어가 볼게요.”
“선영아, 잠깐만. 아직 퇴직금도 안 받았잖아.”
“그건 오빠가 알아서 통장으로 보내줘요. 안에 들어갔다가 가라는 말은 못 하겠네요. 그럼, 조심해서 올라가요.”
선영은 돌아서서 계단을 올랐다.
선영이 분수대 앞을 지나올 때 어느새 주호가 뒤쫓아 달려와 선영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잠깐만, 선영아, 나보고 이대로 돌아가라고? 우리 저기로 가서 이야기 좀 더 하자, 어?”
“아파요, 오빠. 할 말 있으면 손 놓고 여기서 말해요.”
주호는 이대로 선영의 손목을 놓을 수가 없다. 손목을 놓아버린다면 선영과는 완전히 끝난 사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영아, 제발 부탁이야.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주호가 울먹였다.
“손목은 놓으시죠.”
어디선가 나타난 재하가 선영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주호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주호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재하의 행동에 적지 않게 놀랐다. 그렇지만 선뜻 선영의 손목을 놓을 수는 없다.
“아니, 작가님이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이건 누가 봐도 제가 신경 써야 할 일 같은데요.”
주호를 바라보는 재하의 시선이 강렬하다.
“우린 작가님이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요.”
“사이가 어떻든 연약한 여자 손목을 이렇게 꽉 잡고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점잖은 분이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되죠.”
주호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재하의 손에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그때 주호의 주먹이 재하의 얼굴을 강타했다.
“악!”
선영이 주호의 행동에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예기치 못한 한 방을 얻어맞은 재하는 반사적으로 주호에게 주먹을 날릴 기세로 주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때 선영이 재하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재하를 말렸다. 재하는 이내 움켜쥔 주먹을 거두고 주호를 밀쳤다. 뒤로 몇 걸음 밀려난 주호는 순간적으로 저지른 자기 행동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재하 씨, 입술에서 피 나요.”
선영은 재하의 터진 입술을 보고 안타까워했다.
“괜찮아요, 선영 씨.”
재하는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에 묻은 피를 쓱 닦으며 말했다.
선영은 자기를 도우려다 다친 재하에게 너무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행동을 저지른 주호가 이해되지 않았다. 주호는 여전히 넋 나간 사람처럼 서 있었다.
“오빠, 내가 알던 사람 맞아요? 이건 폭력이에요, 폭력!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예요?”
선영은 주호의 낯선 모습에 화가 나면서도 안타까웠다. 주호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굳게 닫힌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선영은 그런 주호를 더 이상 비난하고 싶지 않아 그대로 돌아서 버렸다.
“재하 씨, 우리 들어가요.”
선영이 재하의 다친 입술을 살피며 말했다. 재하는 주호를 향해 묵례로 예를 표하고 선영과 함께 건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는 주호는 후회막급이었다. 이러려고 온 건 아니었는데 간신히 남아 있는 희망의 불씨마저 발로 짓밟아 버린 기분이 들었다. 더구나 선영과 나란히 걷는 재하를 보고 선영의 마음을 영영 돌릴 수 없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모든 걸 망쳐버린 자신이 싫었다. 주호는 고개를 돌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정문 앞에 세워놓은 차로 걸어가는 길이 마치 가시밭길처럼 느껴졌다.
주호는 차에 올라 선영이 있을 펜션 건물을 바라보았다. 여기에 오는 일도 이젠 없겠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흘러내렸다.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망쳐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주호는 자신을 자책하며 많은 추억이 깃든 펜션을 뒤로하고 서울로 차를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