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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 Oct 01. 2024

제22화 굿즈

 주호가 다녀간 다음 날이다. 선영은 출판사 책상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를 읽어 내려가고 있다. 그러다 문득 어제 일이 떠올라 파스가 붙여진 손목을 매만진다. 

 어제 주호를 만나고 사무실로 돌아와 작업하고 있을 때 재하가 들어왔다. 

 “손목에 이거라도 붙이는 게 낫겠어요.”

 재하가 파스를 내밀었다. 직접 차를 몰고 약국까지 가서 사 온 파스였다.

 “난 괜찮은데 재하 씨 입술에 약 발라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 정도면 약 안 발라도 괜찮아요. 자 봐요, 이제 표도 안 나잖아요.”

 재하가 턱을 들어 보이며 “괜찮죠?” 했다. 입술 안쪽이 터진 거라 겉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당분간은 음식 먹을 때 따끔거릴 거예요. 괜히 저 때문에 재하 씨가 다쳤네요. 미안해요.”

 “미안하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는데요, 뭐.”

 “그런데 재하 씨, 아까 정말로 주호 오빠를 주먹으로 칠 생각은 아니었죠?”
 “아, 그럼요. 저 이래 봬도 평화주의자예요. 그리고 그분도 적잖이 당황한 것 같더라고요.”

 “저도 재하 씨가 그럴 줄 알고 옷자락만 당겼어요. 만약에 재하 씨 주먹이 날아갈 것 같았으면 제가 가운데 막아섰겠죠. 아무튼 고맙고 미안해요.”

 “난 괜찮으니까 선영 씨 손목에 이거 좀 붙여요.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아도 밤 되면 시큰거릴지도 몰라요. 아니, 그러지 말고 제가 붙이게 손목 좀 내밀어봐요.”

 파스만 건네주고 가려던 재하가 그 자리에서 파스 한 장을 꺼냈다. 잠시 망설이던 선영은 재하가 파스에서 속 비닐을 떼어내는 걸 보고 슬며시 손목을 내밀었다. 재하가 파스를 선영의 손목에 말아 붙이고 손으로 선영의 가는 손목을 감싸며 지그시 눌렀다. 그 순간 재하의 자상함이 선영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선영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제 됐어요. 나머지는 놔뒀다가 내일 또 붙여줄게요. 헤헤.”

 재하가 선영의 손목을 돌려주며 해맑게 웃었다. 선영은 재하의 웃음을 좇다가 그의 눈과 마주쳤다. 검은 눈동자가 끝없이 깊어 금세 빨려들 것만 같았다. 누군가의 눈동자를 이렇게 가까이 들여다본 적은 처음이지 싶었다. 재하도 선영이 자기 눈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걸 알고 어색한 표정으로 웃음을 흩뜨렸다. 선영은 아차! 하고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얼굴에서 느껴지는 열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선영은 금세 얼굴이 달아올랐다. 분수대 앞에서 주호가 선영의 손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 때도 재하는 슈퍼맨처럼 나타났다. 늘 부드럽고 온화하다고만 생각했던 재하가 주호의 손목을 붙잡으며 선영의 손목을 놓으라고 단호하게 말했을 때 선영은 재하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나 생각하느라 아무 생각이 안 났다. 그러느라 손목이 아프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사람들 앞에 설 때마다 다른 사람보다 기가 많이 빠져나간다는 재하가 그 순간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지 생각하자 마음이 뭉클했다. 참 고마운 사람이다.

 그때 슬기가 반쯤 열린 사무실 문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언니, 아이스크림 먹게 휴게실로 오세요.”

 “무슨 아이스크림?”

 “아, 아버님이 왔다 가셨는데 사 오셨더라고요.”

 “그래? 여름에는 아이스크림이지. 가자.”


 선영과 슬기가 휴게실에 들어가자, 쭈쭈바를 빨고 있던 미자와 준석이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재하도 준석의 옆에 앉아 하드의 포장지를 뜯고 있었다.

 “누나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준석이 하드와 쭈쭈바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오늘은 하드를 먹고 싶네.”

 선영이 준석이 건네는 하드를 받으면 미자 옆에 앉았다. 

 “그러면 쭈쭈바는 내가 먹을게.”

 슬기가 준석이 들고 있는 쭈쭈바를 가져가며 말했다.

 “여름인데도 안에 있으면 더운 줄을 모르겠어요.”

 선영이 하드 윗부분을 한 조각 베어 물면서 말했다.

 “그렇죠? 서울 같았으면 여름에 에어컨 안 켠다는 건 상상도 못 했을 텐데 여기서는 문만 열어놓으면 이렇게 시원한 바람이 부니까요.”

 재하가 선영의 말에 맞장구쳤다. 

 “펜션 시작할 때 에어컨에 신경 써야 한다고 하길래 공간마다 에어컨을 설치했는데 자연 바람이 워낙 시원해서 잘 안 틀게 되더라고.”

 쭈쭈바를 먹던 미자가 실내를 둘러보며 말했다. 

 “구례라고 다 이러지는 않아요. 아버지 집에는 에어컨 안 틀면 자다가도 땀이 흐를 정도예요.”

 준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기가 산바람하고 강바람이 만나는 지점이라 더 시원한 것 같아요. 그리고 복도 천장에 팬이 있어서 서가에서 책 보는 손님들도 덥다고 하는 걸 못 봤어요. 그런데 복도 천장에 팬을 다는 건 누구 아이디어였어요? 손님들이 운치 있다고 좋아하더라고요.”

 슬기가 선영과 미자를 번갈아 보고 말했다.

 “어, 복도가 길어서 다소 밋밋할 것 같아서 서가 꾸밀 때 달아달라고 한 거야.”

 선영이 복도 쪽을 돌아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달 때는 너무 요란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었는데 지금은 잘했다 싶어.”

 “말이 나와서 말인데, 우리도 굿즈 한번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갑자기?”

 슬기의 말에 준석이 눈을 크게 떴다.

 “들어봐. 갑자기는 아니고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새로 생긴 카페를 소개하는 채널을 봤는데 거기에서는 굿즈를 팔더라고. 머그잔, 나무젓가락, 에코백, 손수건 같이 종류도 다양했어.”

 “카페에서 직접 만들어 파는 건가 보네.”
 미자가 흥미를 보이며 말했다.

 “그건 아니고 그 지역 공방에서 만든 것들을 가져다가 판다고 하더라고요. 진행자가 번거롭지 않냐고 물었더니 전혀 아니라고 했어요. 오히려 지역 활성화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생겨서 좋다면서요.”

 “지역 사람들끼리 상부상조하는 거네. 그거 좋은 생각 같은데요.”

 재하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면 슬기 네 생각은 우리도 그렇게 해보자고?”

 선영이 슬기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지역에는 공방이 없어서 그럴 수는 없지만 책방하고 관련된 건 우리가 만들 수 있겠다 싶어서요.”

 “예를 들면?”
 “책갈피도 좋고 책 담을 수 있는 에코백도 좋을 것 같아요.”

 선영의 말에 슬기가 곧장 대답했다.

 “그걸 우리가 직접 만들 수 있을까?”

 “우리가 직접 만드는 게 아니라 디자인만 고안해서 업체에 의뢰해야죠.”

 “고모 생각은 어떠세요?”

 선영이 미자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좋은 생각 같네. 일단 두 종류로 해보고 나중에 좋은 아이템 있으면 추가하면 되잖아.”

 “그럼, 재하 씨 생각은요?”

 “저도 찬성이에요. 굿즈를 그냥 팔기도 하고, 책 사는 손님들에게 도장 열 개를 모으면 선물로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굿즈를 그런 식으로 활용하는 것도 좋겠네요. 준석이 생각은 어때?”

 “저도 좋아요. 그러면 여기 이름을 따서 책갈피나 에코백에 거북이 그림을 넣으면 어때요?”

 “이렇게?”

 슬기가 메모지에 거북이를 뚝딱 그려서 앞으로 내밀었다. 거북이를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이었다.

 “오, 이 그림 괜찮다. 슬기가 그림을 잘 그리네.”

 선영이 슬기가 그린 거북이 그림을 보며 칭찬했다. 미자와 재하도 그림을 맘에 들어 했다. 

 “슬기가 수업 시간에 교과서 중간중간에 삽화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준석이 흐뭇하게 슬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수업 시간에 연습해서 실력이 이렇게 좋은 거구나.”

 선영의 말에 모두 까르르 웃었다.

 “그러면 슬기가 그린 거북이 그림을 굿즈에 넣는 거로 하고 어떤 재질로 책갈피와 에코백을 만들지 생각하면 되겠네요.”

 “그러면 언니, 에코백은 면으로 만들고 색상은 두세 가지로 하면 될 것 같아요.”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다.”

 선영이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메모했다.

 그때 재하가 하드를 다 먹고 남은 막대기를 내밀면서 "이거 어때요?" 했다.

 “깨끗하게 드셨네요, 형.”

 준석이 빙그레 웃으며 재하에게 말하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아니라, 나무 책갈피가 어떠냐고? 대나무도 괜찮고. 여기에서 가로세로를 좀 더 늘려서 윗부분에는 작은 거북이 그림을 인장처럼 새기고 세로로 거북이 책방이라고 인쇄하는 거지.”

 “오, 좋은 생각이에요, 재하 씨. 나무나 대나무는 촉감이 좋아서 책 읽을 때 매만지면 기분도 좋아지겠어요.”
 선영이 곧장 휴대전화에 메모했다. 

 “이야,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이야기하니까 금세 굿즈 문제가 해결됐네요.”

 슬기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래서 아이스크림 자주 먹자고?”

 준석이 슬기를 보고 천진하게 웃었다. 

 “하하하, 너 농담하는 거 보니까 오늘 기분 좋구나.”

 슬기가 준석을 어깨로 밀치며 말했다. 모두가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오늘 슬기가 좋은 아이디어를 낸 덕분에 거북이 펜션에 근사한 굿즈가 생겼네.”

 미자가 슬기를 칭찬하자 슬기가 싱글벙글 웃으며 좋아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에 맛있는 음식 시켜 먹으면서 파티하면 어떨까요?”

 선영의 제안에 모두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음식은 제가 만들게요.”

 준석이 손을 번쩍 들었다. 

 “준석이가 음식을 만들면 먹는 우리는 좋지. 그런데 혼자 요리하는 걸 보는 우리는 마음이 불편할 거야. 그러니까 오늘 저녁에는 다 같이 쉰다고 생각하고 그냥 주문해서 먹자.”

 “그래, 선영이 말대로 해. 음식 만드는 데 신경 쓰면 제대로 먹지도 못하잖아. 먹을 때 다 같이 먹어야지.”

 미자가 준석을 보며 말했다.

 “그럼, 음식은 저랑 준석이가 가서 찾아올게요.”

 재하가 준석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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