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 북스테이 손님들이 식사를 끝내고 저마다 객실로 돌아간 뒤로 재하와 준석이 주문한 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식탁에 음식을 차려놓으니 파티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탕수육, 깐풍기, 팔보채, 칠리새우, 누룽지탕에 볶음밥까지, 와, 다섯 명이 먹기에는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슬기가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보고 턱을 떨어뜨렸다.
“슬기 넌 2인분이잖아. 많이 먹어.”
미자가 슬기의 배를 가리켰다.
“네, 잘 먹겠습니다.”
슬기가 펭귄 박수를 치면서 귀엽게 웃었다.
“파티에 술이 빠지면 서운하겠죠?”
재하가 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사 온 캔맥주와 샴페인을 비닐봉지에서 꺼냈다.
“근데 이건 샴페인 아니에요, 형님?”
슬기가 재하에게 물었다. 원래 슬기는 재하를 아주버님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하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오빠라고 불렀던 터라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재하가 결혼하기 전까지는 편한 대로 오빠라고 부르면 안 되냐고 했더니, 시아버지인 기동이 정 그러면 차라리 형님이 낫겠다고 한 것이다. 형님이라는 호칭도 어색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조선시대 호칭처럼 들리는 아주버님보다는 부르기가 수월했다. 반면에 재하는 준석과 슬기가 혼인 신고를 한 후로는 슬기를 꼬박꼬박 제수씨라고 불렀다.
“아, 내가 샴페인 좀 사달라고 재하 씨에게 부탁했어. 다들 고생한 덕분에 이만하면 펜션도 안정을 찾았으니까 축하하고 싶어서. 슬기 너도 샴페인 조금은 괜찮지?”
선영이 재하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슬기는 기분만 내게 한 모금만 마셔보겠다고 했다.
어느새 재하는 샴페인을 다섯 개의 유리잔에 따르고 있었다. 그걸 본 준석이 곧장 한 명씩 돌아가며 잔을 건넸다.
“고모, 다 같이 건배하게 한말씀하세요.”
선영이 잔을 들고 미자에게 말했다. 미자가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혼자 밥 먹을 때가 많았는데, 이젠 식사 때마다 같이 밥 먹을 식구들이 있으니까 내가 얼마나 흐뭇한지 모르겠어요. 모두 고맙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서로 도와가며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다들 수고했어요. 그리고 바쁠 때마다 와서 도와주는 우리 작가 선생님, 정말 고마워요.”
미자의 말에 재하가 손사래를 쳤다.
“별말씀을요. 저도 한 식구나 마찬가진데요, 뭐.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세요.”
“평상시에는 재하라고 부르다가도 나도 모르게 한 번씩 그렇게 나오네요. 이해해요. 자, 그럼 우리 건배해요.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미자의 말이 끝나자, 모두가 “위하여!”를 외치면서 잔을 쨍! 하고 부딪쳤다.
식구들은 음식을 다 먹은 뒤에도 그대로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다. 준석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별관에 잠깐 가고 없었다. 잠시 후 준석이 기타를 가슴에 끌어안고 돌아왔다.
“웬 기타야?”
선영이 의아해하며 준석이 들고 온 기타를 바라봤다.
“아, 준석이가 기타를 잘 쳐요. 한동안 기타 치는 거 못 봤는데, 오랜만에 듣겠네요.”
재하가 선영을 보며 말했다.
“오, 준석이 멋지다.”
선영은 준석의 또 다른 재능을 알게 되어 흐뭇했다.
“준석이가 좀 멋지긴 해요.”
슬기는 자기가 말하고도 민망한지 히히 웃었다.
“그래그래, 준석이가 요리뿐 아니라 다른 재주도 많네.”
미자도 준석을 보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준석이 몇 번 기타 줄을 딩딩 퉁기며 음을 조율한 다음 연주를 시작했다. 그가 처음으로 연주한 곡은 버스커버스커의 ‘여수 밤바다’였다. 모두 아는 곡이라 기타 음에 맞춰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고요한 여름밤에 퍼지는 기타 소리가 풀벌레 우는 소리처럼 정겨웠다. 밤과 기타 연주는 아주 잘 어울렸다. 준석이 연주한 다음 곡은 버스커버스커의 ‘벚꽃 엔딩’이었다. 준석은 기타를 배울 때 자기가 좋아하는 버스커버스커 노래로 연습했었다.
“누구 기타 연주하실 분?”
준석이 연주를 끝내고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 맞다. 고모도 한 번 해보세요.”
선영이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치며 미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장님, 기타 치실 줄 아세요?”
준석이 놀랍다는 듯이 미자에게 물었다.
“잘은 못하고 가끔 악보 보면서 한 번씩 치는 정도야.”
“그럼 제가 가서 악보 가져다드릴까요?”
준석이 일어서며 물었다.
“고모, 그 노래는 악보 없이도 치시잖아요.”
“아, 그 노래. 그럼 한 번 해볼까?”
미자는 준석이 건네준 기타를 받아서 신중하게 코드를 잡고 기타 줄을 한두 번 퉁겼다. 곧이어 모두의 시선을 받고 미자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모두 미자의 차분한 기타 연주에 놀란 표정이었다. 그때 미자가 곱고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널 위한 나의 마음이 이제는 조금씩 식어 가고 있어
하지만 잊진 않았지 수 많은 겨울들 나를 감싸 안던 너의 손을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때쯤에 또다시 살아나
그늘진 너의 얼굴이 다시 내게 돌아올 수 없는 걸 알고 있지만
가끔씩 오늘 같은 날 외로움이 널 부를 때
내 마음속에 조용히 찾아와줘…….
“와, 기타 연주에 노래도 잘하시고 너무 멋져요, 사장님.”
슬기가 힘껏 박수를 치며 말했다.
“이야, 너무 좋아요. 저는 오늘부터 사장님 팬입니다.”
재하의 말에 이어 준석이 “저도요. 저는 기타 연주하면서 노래하는 건 헷갈려서 못 하겠던데, 사장님은 노래까지 잘하시네요. 대단하시고 멋지세요. 앵콜로 또 듣고 싶네요.”라며 엄지척했다.
“악보 없이 칠 수 있는 건 이 한 곡밖에 없어.”
미자가 기타를 준석에게 돌려주며 생긋 웃었다.
“그 노래 제목이 뭐예요. 저도 연습해 보게요.”
준석이 미자에게 물었다.
“아, 90년대에 나온 노랜데, 장필순의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라는 곡이야.”
“저도 처음 들었는데 노래가 좋아서 다시 들어봐야겠어요.”
재하가 휴대전화에 노래 이름을 메모하며 말했다.
그때 한 남자가 열린 문으로 머리를 내밀며 문을 똑똑 두드렸다. 모두의 시선이 문으로 쏠렸다. 그는 이틀째 머물고 있는 북스테이 손님으로 이름은 김달이었다.
“어머, 저희 소리가 너무 컸나 봐요. 죄송해요.”
선영은 미안해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게 아니라 기타 연주가 너무 좋아서 그대로 방에 있을 수가 없어서 온 거예요. 그런데 벌써 끝난 건가요?”
김달은 미안해하는 선영에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그러셨어요? 난 또 우리가 너무 시끄럽게 한 것 아닌가 하고 걱정했어요.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선영이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김달을 알아본 미자와 준석과 슬기도 반색하며 자리를 마련했다.
“괜찮으시면 맥주 좀 드시겠어요?”
준석이 김달에게 캔맥주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아, 네, 안 그래도 맥주 생각이 났는데 잘됐네요.”
김달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준석이 건네는 캔맥주를 받았다.
“그런데 오늘 무슨 파티 하셨나 봐요.”
김달이 식탁에서 빈 그릇을 주방으로 옮기는 재하와 선영에게 물었다.
“아, 펜션 식구들끼리 그동안 수고했다고 파티하고 있었어요.”
“그러면 식구들끼리 펜션을 운영하시나 보네요. 어쩐지 단란해 보인다 했어요.”
선영의 말을 듣고 김달이 식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김달과 눈이 마주친 재하는 ‘잘 보셨네요.’ 하듯이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조금 전에 기타 연주를 참 잘하시던데 누가 하신 거예요?”
김달이 재하를 보고 물었다.
“아, 저 주방에 계시는 분들이 연주하신 거예요.”
재하가 주방에서 정리 중인 미자와 준석을 보고 말했다.
김달이 주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준석이 한쪽 손을 들어올리며 헤헤 웃었다. 그 옆에 있던 미자는 그런 준석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음식이 맛있는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네요. 아예 주말 같은 때 미니콘서트를 하시죠? 한 번씩 기타 연주한다고 하면 손님들도 무척 좋아할 것 같은데요.”
“아이고, 준석이는 몰라도 난 그럴 실력이 안 돼요.”
미자가 주방에서 나오며 손사래를 쳤다. 준석은 미니콘서트라는 말에 약간 들떠 보였다.
“그 정도면 훌륭하시죠. 여기 북스테이 손님들도 감미로운 기타 연주를 들으면 아마 다음에 안 오고는 못 배길걸요. 무엇보다도 분주한 도시로 돌아가서도 삶을 지탱해 주는 좋은 추억이 될 거예요.”
“듣고 보니까 그것도 좋은 생각인데요, 사장님?”
재하가 눈을 반짝이며 미자를 바라봤다. 옆에 있던 선영과 슬기도 재하와 같은 생각이었다. 준석은 이미 손님들 앞에서 기타 연주하는 걸 상상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손님들 앞에서라면 우리끼리 이야기하다가 재미 삼아 기타 치는 거랑은 다르잖아. 내가 곡을 많이 아는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미니콘서트니까 사이사이에 이야기도 나누면서 기타 연주하면 굳이 여러 곡일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김달은 꼭 그렇게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면 콘서트는 좀 더 생각해 볼게요. 이렇게 좋은 제안도 해주시고 고맙습니다.”
선영이 김달에게 생긋 웃으며 말했다.
“준석아, 이쯤 해서 한 곡 연주하는 게 어떠냐?”
재하가 기타를 준석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안 그래도 저도 한 곡 연주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는데 잘됐네요.”
김달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준석이 버스커버스커의 여수 밤바다를 다시 연주하는 동안 김달은 마치 여수 밤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듯이 그 분위기에 흠뻑 젖었다. 그 모습을 본 미자도 준석의 연주가 끝나자, 기타를 건네받고 연주를 시작했다. 이번에도 노래와 함께였다. 김달은 자신을 위해 노래까지 부르는 미자에게 크게 감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