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이 되자 선영은 출간 작업에 들어갔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출간 작업만 한 것은 아니다. 오전에는 펜션 식구들과 함께 펜션을 구역별로 나눠서 청소하고 퇴실한 객실을 다시 말끔하게 단장했다. 그런 다음 다 같이 점심을 먹었다. 선영이 출판사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은 그 이후였다. 선영이 사무실로 쓰는 공간은 명상 체험 교실 바로 옆으로, 교실을 반으로 나눠 만든 객실을 사무실로 꾸몄다. 선영은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작업이라 굳이 사무실까지 둘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미자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리 1인 출판사라도 사무실을 갖추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마음가짐부터 다르다, 그 일을 취미 삼아 하는 게 아니라 전문가로서 임하고 있다는 마음가짐을 위해서라도 사무실은 있어야 한다는 게 미자의 생각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사무실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일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위해서라도 필요했다. 침대를 빼고 사무실로 꾸미는 일은 재하와 준석이 도왔다. 사무실 입구에는 ‘도서 출판 거북이’라는 아크릴 팻말을 매달았다.
작은 객실 하나를 사무실로 바꾸면서 기존의 가족용 객실 셋 중 둘을 반으로 나눠 작은 객실로 바꿨다. 북스테이 콘셉트로 운영하면서 가족 단위 손님은 거의 없고 대부분 혼자 오는 손님이었기 때문에 넓은 객실보다는 작고 아늑한 객실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본관에는 큰 객실 하나, 작은 객실 열, 카페와 주방이 있는 휴게실, 명상 교실, 출판사, 비품실 그리고 복도에 차려진 책방이 있었다.
오후에는 출간 작업하는 선영을 돕기 위해 재하가 펜션에 내려와 저녁까지 머물렀다. 그는 서가 끝에 놓인 책상에 앉아 글을 쓰다가 손님들이 책 찾는 것을 도왔다. 이따금 선영은 사무실을 나와 재하와 대화를 나누며 커피를 마셨다. 대화 주제는 주로 재하가 쓰는 글이나 유튜브 영상 촬영과 편집, 그리고 펜션에 관한 이모저모였다.
“혼자 작업하는 소감이 어때요? 팀원들이랑 일하다가 혼자 하려니까 좀 이상하지 않아요?”
재하가 선영에게 묻는다.
“그런 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예전에 출판사를 처음 시작할 때가 생각나서 좋아요. 그때는 혼자서 이것저것 하느라 바쁘면서도 몇 년 후에 출판사가 어떻게 변하게 될지 생각하면 무척 설렜거든요. 출판사를 키우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고요.”
“그러면 지금은 출판사를 키우고 싶은 욕심은 없어요?”
“지금은 출판사를 키우고 싶은 욕심은 없고, 일 년에 책 한 권을 만들더라도 즐겁게 만들고 싶어요. 책을 여러 권 낼 욕심으로 일에 치여서 살고 싶지는 않거든요.”
“그 말에 저도 공감해요. 유튜브에 올리는 콘텐츠를 만들 때도 제가 즐거워야지 보는 사람도 좋아하더라고요. 그건 그렇고 설마 일 년에 책 한 권만 낼 거란 말은 아니죠?”
재하가 씩 웃으며 선영을 흘끔 본다.
“그야 모르죠. 지금 만들고 있는 책 마무리되는 거 보고 생각해 봐야겠는데요.”
선영은 재하의 농담을 받아 돌려주며 쿡쿡 웃다가 다시 말을 잇는다.
“왜요? 제가 재하 씨 책 내는 거 잊어버렸을까 봐요?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책은 안 내더라도 재하 씨 책은 꼭 낼 테니까요.”
“그런 거죠? 혹시 선영 씨가 힘들어서 못 한다고 할까 봐 가슴이 철렁했네요. 하하하.”
“재하 씨도 참, 제가 누구 때문에 여기서 출판사를 하는데, 재하 씨 책을 소홀히 하겠어요. 하하하.”
“제가 선영 씨 덕분에 오늘은 글이 잘 써질 것 같네요.”
“그러면 저도 이만 들어가서 작업해야겠네요. 글 열심히 쓰세요.”
“네, 수고해요, 선영 씨.”
재하는 미소를 지으며 사무실로 들어가는 선영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선영이 들어가고 얼마 있지 않아 카페에 있던 준석이 재하에게 다가왔다.
“형, 선영 누나한테 남자친구가 있었던 거 알아요?”
“뭐, 뭐? 남, 남자친구?”
재하가 말을 더듬는다.
“네. 혹시 알아요?”
“예전에는,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묻냐?”
“아니, 그 전 남자친구라는 사람이 찾아왔더라고요.”
“뭐? 언, 언제?”
“조금 전에 카페로요.”
“그러면 지금도 카페에 있어?”
“아니요. 사장님이 그분을 데리고 운동장 쪽으로 가셨어요. 그런데 사장님이 나가시면서 선영 누나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형한테 슬쩍 물어보는 거예요.”
“어, 그랬구나. 선영 씨가 전에 근무한 출판사 사장이라 정리할 게 있어서 왔나 보다.”
재하는 주호와 선영이 이미 끝난 사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주호가 연락도 없이 찾아왔는지 궁금했다. 재하는 출판사에 계약하러 갔을 때 주호를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정장이 잘 어울리고 세련되게 가르마를 탄 머리 스타일이 매우 인상적인 전형적인 도시 남자였다. 그때는 주호와 선영이 사귀는 사이라는 건 알지 못했다. 나중에 담당 편집자와 밥을 먹으며 이야기하던 중 두 사람이 출판사를 같이 설립했고 곧 결혼할 사이라는 걸 알았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두 사람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성공한 도시 남자는 선영을 두고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말은 주호를 두고 하는 말이려니 했다. 같은 남자지만 주호가 결혼할 사람을 두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갔다. 그런 일이 있고 선영은 이곳으로 내려와 웃음을 되찾고 잘살고 있었다. 그런데 몇 개월이 지난 지금 그가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재하는 주호가 겨우 아문 선영의 상처를 다시 들추는 건 아닌지 걱정됐다.
미자는 주호와 함께 정원에서 운동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식 관람석 맨 아래 좌석에 앉았다. 본관에서 내다봐도 보이지 않은 곳이었다. 미자는 연락도 없이 주호가 카페에 불쑥 들어섰을 때 가슴이 철렁했다. 주호의 방문이 선영에게 또다시 상처를 주지 않을까 해서였다. 일단 선영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곧장 주호를 데리고 나온 것이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고모님?”
“보다시피 나야 잘 지냈네. 그런데 연락도 없이 무슨 일로 왔나?”
“진즉 찾아뵀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내가 자네를 얼마나 든든하게 생각했는지는 내가 말 안 해도 잘 알 걸세. 자네가 선영이를 두고 그런 일을 했다고 들었을 때도 믿어지지 않더군. 지금 와서 그런 얘기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마는 내가 너무 속상해서 하는 말이려니 생각하게.”
“제가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어요, 고모님. 죄송합니다. ……그런데 고모님, 제가 잘못은 했어도 이대로 손 놓고 선영이를 놓칠 수가 없어서 왔습니다. 선영이에게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부탁하려고요. 미리 연락하면 오지 말라고 할 게 뻔해서 무작정 얼굴이라도 보면서 이야기하려고 이렇게 왔습니다.”
“하지만 선영이가 자넬 만나고 싶지 않을 거네. 선영이가 말은 안 해도 속이 괜찮을 리 있겠는가? 다행스럽게도 여기에서 할 일을 찾았고 지금은 그 일 하면서 잘 지내고 있네.”
“안 그래도 펜션을 새롭게 단장하셨더군요.”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선영이가 맡아서 한다고 고생했지. 그래서 말인데 선영이가 겨우 상처를 잊고 살아가고 있는데 자네를 만나면 다시 힘들어지는 거 아닌지 걱정이 되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그래도 죄송하지만 선영이를 만나서 이야기 좀 하게 해주세요, 고모님. 선영이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 퇴직금 이야기도 못 했거든요.”
“휴!”
미자는 주호의 말을 듣고 한숨을 길게 내보낸다.
“그러면 내가 들어가서 선영이에게 자네 왔다고 말해 볼 테니까 자네는 여기서 기다리게.”
“감사합니다, 고모님.”
주호는 일어서서 미자에게 고개를 깊이 숙인다.
미자는 주호를 뒤로하고 선영을 만나러 가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주호가 왔다는 말을 듣고 선영이 어떻게 반응할지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할 따름이다.
재하는 노트북 너머로 밖에서 들어온 미자가 출판사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미자가 곧장 사무실 문을 열지 않고 그대로 서 있는 걸로 보아 지금 그녀의 머릿속이 얼마나 복잡한지 재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주호가 돌아갔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재하는 마음이 답답했다. 바람이라도 쐐야 할 것 같아 옆문으로 나왔다. 뒤뜰 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 진순이와 독도가 보였다. 잠시 진순이와 독도를 운동장에 데리고 가서 공놀이라도 시키면 좋을 것 같았다.
운동장 초입에서 재하가 먼저 진순이 목줄을 풀고 운동장 끝으로 테니스공을 던졌다.
“진순아, 공!”
진순이 재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이 날아간 쪽으로 쏜살같이 달렸다. 재하는 독도의 목줄을 손에 쥐고 진순이가 달려가는 쪽을 지켜봤다. 진순이 순식간에 운동장 끝자락에서 공을 찾아 물고 전속력으로 재하에게 달려왔다. 독도가 그 모습을 보고 멍멍 짖었다.
“그렇지. 진순아, 잘했어.”
재하가 진순이 물어온 공을 손에 들고 껄껄 웃었다. 진순이 재하의 칭찬에 격하게 꼬리를 흔들며 좋아했다.
“다음은 독도가 공을 찾아오는 거다.”
재하가 진순이에게 목줄을 다시 채운 다음 독도의 목줄을 풀었다. 재하가 테니스공을 들어 보이자, 독도가 멍멍 짖으며 공에 시선을 모았다.
“독도야, 공!”
재하가 공을 힘껏 던지면서 외쳤다. 올라간 재하의 팔이 내려오기도 전에 독도는 날아가는 공을 따라 뛰었다. 어느새 독도가 입에 공을 물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왔다. 독도의 빠른 속도에 재하의 입이 벌어졌다.
“우와, 우리 독도 엄청 빠르네.”
재하는 독도를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정원에 나와 있는 손님들이 그 모습을 보고 손뼉을 쳤다. 그 소리에 재하가 고개를 돌렸다. 몇몇 손님들은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었다. 재하가 독도에게 다시 목줄을 채우고 독도와 진순을 앞세우고 손님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둘 다 한바탕 신나게 달려서인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독도와 진순이 다가가자, 손님들이 휴대전화를 꺼내 촬영했다. 그때 한 손님이 독도와 진순에게 다가오며 손을 내밀었다. 보통 손님들은 개를 좋아하면서도 혹시나 개가 물기라도 할까 봐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런데 그 손님은 개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혀로 똑똑 소리를 내며 독도와 진순을 쓰다듬었다. 독도와 진순도 손님의 손을 핥으며 좋아했다.
“어? 혹시 정주호 사장님 아니세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재하가 주호를 알아보고 말했다. 비록 한 번 봤을 뿐이지만 머리 스타일이 워낙 인상적이었고 더구나 준석에게서 주호가 왔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네, 그런데 누구신지?”
주호가 일어서면서 재하를 바라봤다. 주호는 재하를 알아보지 못했다.
“전에 출판사에서 출판 계약할 때 한 번 뵌 적 있는데 아마 기억 못 하실 거예요. 저는 신재하라고 합니다. 『가끔은 불안해도 여전히 씩씩하게 살고 있습니다』와 『심리학을 알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책을 냈는데…….”
“아, 알죠, 알죠. 아이고, 반갑습니다, 작가님.”
주호가 재하에게 악수를 청하자, 재하가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여기서 작가님을 만나 뵙게 되네요.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아, 저기 언덕 너머가 제 집이에요. 사촌 동생도 여기서 일하고 있어서 펜션 바쁠 때는 저도 여기 내려와 있거든요.”
“이런 신기한 우연이 다 있네요.”
주호는 놀랍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저도 선영 씨를 보고 세상에 이런 우연이 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하하.”
재하의 말을 듣고 있던 주호는 ‘선영 씨?’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동시에 왠지 모를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일순 주호의 표정이 굳어졌다. 재하도 주호의 표정에서 불편함을 읽었다. 재하는 왠지 주호의 그런 표정이 고소했다.
“저는 이만 일이 있어서 안에 들어가야겠네요. 그럼 볼일 보시고 조심히 가세요, 사장님.”
“아, 네, 작가님. 여기서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럼 들어가세요.”
재하가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이고 인사했다. 주호도 고개를 숙이고 재하의 인사에 답했다.
재하가 독도와 진순을 앞세우고 본관 가장자리를 지날 때 반대쪽에서 선영이 나왔다. 선영이 정원으로 걸어가는 걸로 보아 주호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 주호를 피하는 건 선영이 지난 일을 잊는 데 전혀 도움 되는 일이 아니었다. 재하는 주호를 만나기로 한 선영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주호를 만나러 가는 지금 선영은 생각이 복잡할 터였다. 하지만 돌아설 때는 피하지 않고 만나기를 잘했다고 선영이 뿌듯해할 거라고 재하는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