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광 Oct 01. 2024

제29화 농담

 두 번째 콘서트 당일 아침 재하와 선영은 독도와 진순을 앞세우고 섬진강 강변을 따라 산책에 나섰다. 아침 산책이 좋다는 재하의 말을 듣고 선영도 동행한 것이다. 서울에서 구례에 한 번씩 내려올 때는 가끔 강변을 따라 산책하는 걸 즐겼다. 하지만 구례에서 살고부터는 북스테이 손님들에게 강변을 따라 산책할 것을 권유는 했어도 정작 자신은 한 번도 가지 못했다. 산책뿐만 아니라 미자를 포함한 펜션 식구들이 개인 시간을 갖도록 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일 아니고서는 펜션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벌여놓은 일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 때문이었고 거기에 주호를 잊기 위한 몸부림이 더해져서 그러지 못했다. 시간이 가면서 주호에 대한 기억은 시나브로 희미해졌고 책임감은 펜션 식구들에 대한 애정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펜션 식구들과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해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펜션에 혼자 남더라도 어느새 옆에 와 있는 재하가 있어서 외로울 틈이 없었다. 

 지난밤 재하가 집으로 가면서 선영에게 말했다. 

 “내일은 콘서트 날이니까 생각도 정리할 겸 아침 일찍 저랑 같이 산책하러 가요.”

 “그래도 될까요? 아침에 할 일이 없으려나?”

 선영은 곰곰 생각했다. 그때 재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콘서트 때문에 아침부터 할 일은 없어요. 괜히 마음이 조급해져서 그러는 거지. 이럴 때일수록 잠깐이라도 일터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필요한 거예요. 저도 아침마다 강변으로 산책하러 가는데, 돌아올 때 기분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러지 말고 저랑 같이 산책하고 와요.”

 “재하 씨가 그렇게 말하니까 기분이 좀 이상하네요.”

 “이상하다니 뭐가요?”

 “아니, 꼭 데이트 신청하는 것 같아서요.”

 선영이 일부러 재하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웃음을 참고 말했다. 예상했던 대로 재하의 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선영은 참았던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 이번에도 저 놀리는 거죠." 웃는 선영을 보고 재하가 말했다. "이제 안 속아요.”

 “안 속는데 재하 씨 귀는 왜 그래요?”

 “글쎄요. 내 귀가 왜 이럴까요?”

 재하가 양쪽 귀를 비비며 헤헤 웃었다.

 “고마워요, 재하 씨. 제 짓궂은 농담도 받아줘서요. 제가 재하 씨에게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참 나, 한 식구끼리 보답은 무슨 보답이에요. ……그러면 내일 아침에 저랑 같이 산책하러 가는 거죠?”

 “물론이죠. 내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재하 씨 따라갈게요.”

 재하는 최근 들어 부쩍 농담이 는 선영을 보고 안심이 됐다. 이제 서울에서 있었던 좋지 않은 기억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이곳 생활에 흠뻑 젖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이런 농담을 하는 건 아니었다. 오직 재하에게만이었다. 재하의 귀를 달아오르게 한 건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또한 귀가 붉어지는 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선영에 대한 감정이 이미 특별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신호였다. 한동안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래서 재하는 좋으면서도 어색했다. 

 지금은 시간이 꽤 지난 일이지만, 재하는 몇 번 여자를 사귄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모두 오래가지는 못했다. 헤어진 이유도 매번 비슷했다. 청소년기에 힘든 시간을 겪었던 재하는 지난날의 상처에서 비롯된 우울을 잠재우고 살아갈 용기를 얻기 위해 가끔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녀들은 그런 재하를 두고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사람이라며 재하에게서 멀어졌다. 그때는 재하도 붙잡을 용기가 없었고 붙잡는다고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았다. 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고도 싶었지만, 상대는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별을 받아들였다. 그 이후로는 사적으로 이성을 만나는 것을 꺼려왔다. 그럼에도 선영에게는 꺼려지는 마음이 없었다. 물론 선영도 어렸을 때 갑작스럽게 부모를 떠나보낸 아픔이 있어서 재하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줬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선영은 재하를 알아봐 주고 작가로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준 사람이었다. 선영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삶은 상상하지도 못했을 터였다. 그러니 재하에게 선영이 특별한 건 당연했다. 시작은 그러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특별함을 넘어 이성에게 느끼는 감정까지 문득문득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러니 재하의 귀가 붉어지는 건 당황스러우면서도 행복한 일이었다. 

 “재하 씨 말대로 나오니까 좋네요.”

 선영이 펜션으로 돌아가는 길에 말했다. 

 “그거 봐요. 머리도 맑아지고 좋잖아요. 분명 오늘 하는 모든 일이 잘될 거예요.”
 “이러다가 아침마다 재하 씨를 따라오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네? 그러면 저야 좋죠. 그런데 선영 씨가 안 피곤하겠어요?”

 “그걸 떠나서 사실 매일 일찍 일어날 자신은 없어요. 제가 은근히 아침잠이 많거든요.”

 “그럼 너무 무리하지 말고 일찍 일어나지는 날에만 가는 걸로 해요.”

 “아무래도 그게 좋겠어요.”
 재하와 선영이 펜션 정문에 이르렀을 때 독도와 진순이 큰길을 향해 짖었다. 시선을 돌려보니 오토바이 한 대가 펜션 쪽으로 오고 있었다. 재하와 선영은 ‘이른 아침에 웬 오토바이지?’ 하며 오토바이가 가까이 오길 기다렸다. 

 펜션 정문 앞에서 멈춘 오토바이에서 내린 사람은 바로 오늘 오카리나를 연주하기로 한 이환이었다. 그의 오토바이 헬멧에는 흰 글씨로 천하무적이라고 쓰여있었다. 이환이 태권도 사범임을 일깨워 주는 단어였다. 

 “어, 이환 씨가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선영이 물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수업이 없어서 아침 운동하고 곧장 이리로 왔어요.”

 “그러면 아침 식사 전이겠네요. 들어가서 식사 같이해요.”

 “아, 그래도 될까요? 나중에 빵으로 때우려고 했는데.”

 “아이 참, 운동까지 했다면서 빵으로 되겠어요? 그러다 나중에 힘없어서 연주도 못 하고 쓰러져요.”

 “그래요, 선영 씨 말대로 같이 들어가서 식사해요.”

 “아, 감사합니다. ……조금 전에 두 분 진돗개랑 산책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던데요. 저도 나중에 결혼하면 두 분처럼 반려견 데리고 산책 다니고 싶어요.”

 재하와 선영이 부부인 줄 알았던 이환이 펜션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선영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본 이환이 ‘왜 이러지?’ 하는 표정으로 선영을 바라봤다. 귀가 붉어진 재하는 웃음을 머금고 앞만 보고 걸었다. 

 “왜요? 제가 무슨 실수라도……?”
 이환이 머뭇거리며 선영을 보고 물었다. 

 “이환 씨는 우리가 부부인 줄 알았나 봐요.”

 선영이 어색한 표정을 짓는 이환을 보며 말했다. 

 “부부 아니었어요? 저는 사장님하고 두 아들 내외가 펜션을 운영하시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요?”

 “하하하, 그렇게 보였어요?”
 “네.”

 “그런데 어쩌죠? 다른 두 사람은 부부 맞는데, 우린 아니에요.”

 “아, 죄송해요, 제가 잘 알지도 못하고 불쑥 말부터 해버렸네요.”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런 걸 가지고 죄송하고 말고 그래요? 자, 들어가요.”

 선영이 손사래를 치며 활짝 웃었다. 이환이 재하에게 눈을 돌리자, 재하는 여전히 앞만 보고 웃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본 이환은 고개를 잠깐 갸웃하더니 뭔가 알았다는 듯 씩 웃었다.     


 오전 열한 시경에 이야기 손님인 수창도 재하의 차로 펜션에 도착했다. 재하가 수창이 탄 고속열차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구례역에서 수창을 차로 데려온 것이다. 재하는 펜션을 단장할 때 서가 꾸미는 걸 도우러 온 수창과 현정을 만난 적이 있었다. 수창은 재하 차를 타고 펜션으로 오는 내내 여전히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저는 강연하러 갈 때마다 긴장되던데, 수창 씨는 전혀 그렇게 안 보여서 다행이네요.”

 “긴장되는 건 잘 모르겠고 너무 설레서 며칠 동안 잠이 안 오더라고요. 하하하.”

 “설마 이야기하다가 자는 건 아니겠죠?”
 재하가 수창을 옆눈으로 흘끔 보며 웃었다. 수창은 재하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 설마 그럴 리가요. 그런데 혹시 제가 말하다가 잠들면 재하 씨가 저를 깨워줄 거죠?”

 “네? 그러죠, 뭐. 걱정 마세요. 제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다가 잠잘 것 같으면 얼음물 한 사발 끼얹어 드릴게요.”
 “이야, 얼음물 안 뒤집어쓰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겠는데요. 하하하.”

 “혹시나 수창 씨가 긴장할까 봐 농담한 건데, 역시 긴장하고는 거리가 멀어서 다행이네요.”

 “아, 재하 씨 덕에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어요. 고마워요, 재하 씨.”

 “별말씀을요. 콘서트까지는 아직 시간 많으니까 가서 편하게 쉬세요.”

 “저는 선영 씨 사무실에서 원고 좀 보고 있을게요.”

 “네. 그래요. 점심 식사할 때 되면 제가 부르러 갈게요.”

 “네, 고마워요, 재하 씨.”
 “주말인데 현정 씨랑 같이 오지 그랬어요.”

 “아내는 같이 가자고 했는데, 제가 말렸어요.”
 “왜요? 오가면서 데이트도 하고 좋은 기회인데요.”
 “저도 그러고는 싶은데, 아내가 있으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요. 제가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독립서점 운영하면서 1인 출판사를 해보고 싶다고 했을 때 아내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찬성해 줬어요. 생활은 자기 월급으로 어떻게든 할 테니까, 하고 싶은 일을 해보라고요. 그때 아내가 눈물 나게 고마웠어요.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예요. 지금은 초반에 비해 많이 나아지긴 했어도 여전히 경제적으로는 빠듯해요. 그래도 아내는 이만하면 잘하는 거라고 늘 저를 응원해 주죠. 그런 아내가 눈앞에 있으면 마음이 먹먹해져서 말이 잘 안 나올 거예요.”
 “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네요.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에요. 수창 씨가 부럽네요.”

 “고마운 일이에요. 그건 그렇고 선영 씨가 여기서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보기 좋아요. 아내도 처음에는 걱정했는데, 이제는 전혀 걱정할 것 없다고 그러더라고요. 재하 씨가 선영 씨 옆에 있어서 선영 씨한테 큰 힘이 됐을 거라면서요.”
 “제가 오히려 선영 씨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요, 뭐.”

 “재하 씨한테만 하는 말인데, 우리 부부는 재하 씨랑 선영 씨가 잘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네?”

 재하는 수창에게 이런 말을 들을 거로 생각지도 않았던 터라, 자기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뜨끔해서 하하 웃어버렸다. 오늘 이환에 이어 수창에까지 이런 말을 들어서 인지 자기와 선영이 특별한 사이가 되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무척 좋았다. 더구나 현정과 수창이 자기와 선영이 잘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하니 선영을 생각할 때마다 온몸이 저릿하기까지 했다.

이전 03화 제28화 당신의 음악을 들려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