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는 말 대신에

by 이광

“나의 귀여운 바퀴벌레.”

영화 <킬러의 보디가드>에서 교도소에 수감 중인 아내 셀마 헤이엑이 남편인 최강 킬러 사무엘 L. 잭슨을 부르는 애칭이다. 바퀴벌레는 모종의 둘만의 사랑 표현인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부르는 애칭으로 ‘달링’이나 ‘허니’, 우리말로 ‘자기’ 등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바퀴벌레’라니. 영화에서 이 애칭을 접했을 때 나도 모르게 눈에 힘이 실리고 레몬을 통째로 씹은 듯이 입이 자동으로 벌어졌다. 왜 하필 사랑하는 사람을 ‘바퀴벌레’라고 부르는 것일까.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오래도록 내게 그것은 의문으로 남았다.


그러다 영화의 속편이 개봉되면서 다시 케이블 TV에서 본편이 방영되었다. 그러면서 다시 잊고 있던 ‘왜 하필 사랑하는 사람의 애칭이 바퀴벌레여야 했을까?’라는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그래서 이번에는 곰곰이 생각해 봤다. 토끼도 강아지도 고양이도 아닌 바퀴벌레인 이유에 대해.


생각 끝에 ‘설령 당신이 바퀴벌레일지라도 나는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란 의미일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당연히 사람이 바퀴벌레일 수는 없는 일이지만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바퀴벌레로 변한다 해도 열렬히 사랑하겠다는 뜻이라면 그 사랑에는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영화 속 두 사람의 사랑의 깊이가 명확해졌다. 처음에 접했을 때 일그러졌던 내 표정은 감동으로 바뀌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어디에 비유를 해야지 내 사랑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을까요? 꽃, 별, 하늘, 이러한 모든 것은 식상할 뿐만 아니라 내 사랑의 백만 분의 일도 표현할 수 없어요. 뭐가 좋을까요? 그래요, 바퀴벌레가 있었어요. 여태껏 그 누구도 사랑과 연관 짓지 않았던 바퀴벌레가 있었어요. 나에게 있어서 징그럽고 소름 끼치는 바퀴벌레지만 만약 당신이 바퀴벌레로 변한다 해도 나는 당신을 변함없이 사랑할 거라는 의미로 이제부터 당신을 ‘나의 귀여운 바퀴벌레’라고 부르겠어요. 오, 나의 사랑 바퀴벌레!”


눈에 보이면 기필코 잡아야 하는 바퀴벌레지만 누군가의 사랑의 애칭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달라 보였다. 여하튼 그런 대사를 생각해 낸 작가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작가가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보통의 식상한 사랑 표현과는 다른 뭔가 깊이 있는 사랑을 표현하면서도 웃음도 줄 수 있는 신선한 표현을 고민했을 거라는 것은 분명하다.

사람들은 사랑을 어떻게 말로 표현해 왔는가를 생각해 봤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학습된 '사랑해'라는 표현을 주로 쓴다. 요즘은 직설적으로 '사랑해'라고 말하지만, 예전에는 그 말을 쉽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음으로는 되는 데 입 밖으로 소리 내려할 때면 고구마 몇 개가 한꺼번에 목에 걸린 듯 목소리가 안 나온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과묵한 남성들이 사랑한다고 소리 내서 말하는 것을 몹시 껄끄러워했다. 그럴 때 임시방편으로 “내 마음 알지?”란 표현으로 은근슬쩍 넘기려고 하기도 했었다. 여성도 ‘네 마음이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네 마음’이라는 생각으로 이해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만약 남성이 예전처럼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돌아올 답은 뻔하다. 그것은 아마도 “나도 내 마음을 모를 때가 있는데 말하지도 않는 당신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요?” 일 것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무 자주 하면 값어치가 떨어질 거라는 염려는 전혀 할 필요 없다. 우리가 물건 파는 장사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함으로써 듣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어 행복할 것이고, 또한 말하는 사람에게도 이롭다.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라는 것을 끊임없이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다 보면 사랑의 감정보다는 전우나 동지 같다는 느낌이 우선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우나 동지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구 상에서 수많은 사람들 중에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은 기적이라고 하면 기적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보통의 인연이 아니다. 이런 생각을 자주 하다 보면 당연히 둘의 인연이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 일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상대가 바퀴벌레로 바뀐다 해도 사랑할 마음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서로의 사랑이 깊어지고 점점 더 애틋한 존재가 되어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사랑한다는 말 대신에 다른 표현을 쓴다면 과연 어떤 표현을 쓸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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