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에 겨울이 지날 때

by 이광

아침에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는 바람에 자동차 시동이 잘 걸리지 않아 애를 먹었다. 다른 지방에는 이미 첫눈이 내렸고 잦은 영하의 날씨로 사람들이 잔뜩 움츠리고 다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부산은 겨울에도 따뜻한 편이다. 눈도 외곽에만 조금 내릴 뿐이라 부산에 살면서 눈을 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겨울이면 나는 눈이 그립다.


그런 내가 눈을 원 없이 봤던 시기가 있었다. 바로 군 생활할 때였다. 내가 군 복무했던 곳은 강원도 철원. 나는 그때 두메산골이 어떤 곳인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하늘 빼고는 모두가 산밖에 보이지 않은 곳 바로 그런 곳에서 군 복무를 했다. 나는 그곳에서 복무할 수 있어서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그때 나는 나 자신의 미래에 대해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한 번쯤 그동안의 삶을 조명해보고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때 의무적으로 가게 된 군대는 내게 큰 선물이자 축복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내 군 생활에 대해 묻는다면 내 인생의 바캉스였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 나에게 강원도 철원은 최적의 장소였다. 물론 군 생활이 힘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어쩌면 군 생활 기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쉽지 않은 군 생활을 잘 견딜 수 있었다.


공기 좋고 물 맑은 철원에는 눈이 내렸다 하면 온 세상을 하얗게 몇 겹씩 덮을 정도로 수북하게 내렸다. 그냥 눈을 흩뿌리고 지나가는 날은 없다. 덕분에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해가 질 때까지 하루 종일 눈만 치웠던 적도 많았다. 몇 날 며칠 동안 눈만 치우다 보니 눈이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는 동기들도 있었지만 나는 눈이 조금도 물리지 않고 올 때마다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눈 내리는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인데, 거기에 더해 눈을 맞으며 눈을 치우는 일까지 하게 되다니 이보다 신나는 놀이가 어디 있겠는가. 비록 군화가 젖어 발이 시리고 자칫 동상에 걸릴 뻔도 했지만, 그것조차도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거란 생각에 원 없이 즐길 수 있었다.


군대를 제대한 후 눈을 좀처럼 보기 힘든 부산에서 다시 겨울을 맞게 되었을 때, 역시 군대에서 눈을 마음껏 즐기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군대에 입대하면서 생각했던 만큼 내 미래에 대해 명쾌한 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스케치 정도라도 할 수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군 생활이었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오랫동안 잘 알고 지내는 대학생 민겸이 12월에 군대에 가게 됐다고 며칠 전에 인사하러 찾아왔다. 그는 그날 머리를 스님처럼 빡빡 밀고 오는 길이었다. 자신은 추위를 잘 타는 편인데 하필 겨울에 입대하게 되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입대할 날이 점점 다가올수록 입맛도 없고 잠도 잘 자지 못한다고 했다. 가보지 않은 길을 처음 간다는 것은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일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갔던 길을 가게 된 것이니 그렇게 불안하거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더군다나 요즘에는 핸드폰도 군대에서 사용할 수 있어서 내가 아는 어떤 군인은 일과가 끝나고 내 SNS 계정에 들어와 안부를 묻기도 한다. 이런 얘기를 해주면서 사회에 있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자주 소통할 수 있어서 수월하게 군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는 말도 해줬다. 아무리 군대가 좋아졌다고 해도 처음으로 집을 떠나 통제받는 생활을 해야 하는 당사자로서는 그 자체가 막연한 일이고 힘든 일일 것이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 진한 악수를 하며 건투를 빌었다.


그를 보내고 내 인생의 바캉스 같았던 군 생활이 떠올랐다. 군 복무를 마친 후에 학교를 졸업하고 밥벌이하느라 일방통행만 가능한 길을 계속 걸어야 했다. 오래도록 앞만 보고 그 길을 가면서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더욱 나답게 사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할 틈을 갖고 싶다는 갈증을 종종 느끼곤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럴 여유를 갖기란 쉽지 않았다. 밥 먹고 사는 일이 참 그렇다. 단순하고 반복적이라 별거 없는 일 같아도 막상 생활의 굴레를 벗어나는 일은 여태껏 지켜온 자리를 포기하는 일일 수도 있어서 큰 결단이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를 포기하는 일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일일 수 있어서 받아들이기란 쓰라린 고통이 동반되는 일이다. 하지만 고통을 피하려다가 정녕 내 삶에는 내가 없는 삶이 되어버릴 것이 자명하다. 그래서 나는 올해를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해온 일을 정리하기로 했다. 코로나가 시작하면서 휘청거리기 시작했지만, 그 후로도 계속 적자를 벗어날 수 없었으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마음까지 피폐해졌다. 그대로 있다가는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거라는 생각이 더 두려운 일이었다. 실패를 인정하고 다르게 살기로 마음을 먹자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2021년에 가장 잘한 일은 그동안 하고 싶었던 공부를 시작했던 일이다. 망설임도 있었지만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두 학기를 마쳤다. 내년에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답게 살아가는 일에 더는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대들이 들판 위로 지나가는 계절을 견디었듯이

그대들의 마음속에 지나가는 계절도 견딜 것입니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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