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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 강물처럼 Jan 10. 2021

증인 (2019)

건강한 자폐증과 "안"건강한 자폐증




아버지가 잘못 선 보증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에 허덕이던 한 노총각 변호사 양순호. 목을 조여올 거 같은 빚 독촉에 진저리가 나 민권 변호사 일을 그만두고, 한 법률회사에서 일을 시작한다. 더 많은 고객 유치를 목적으로 회사 사장은 한 살인 사건 피고인을 위한 변호일을 맡았고, 새로 고용한 신참내기 변호사 양순호에게 그 사건을 맡아서 잘 해결해달라고 부탁했다. 모종의 협약이었다. 이 사건을 잘 해결하면 회사에서의 자리매김과 승진을 암묵적으로 보장해준다는 사장의 신호는 순호에게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기회로 다가왔다.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내리막길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한 인생 항로를 뒤집을 수 있는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는 기회. 그가 해야 할 일은 살인자로 몰린 피고가 무죄임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살인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는 중학생 소녀 임지우. 지우는 자폐증을 앓고 있다. 이 아이의 자폐증 정도를 현실조차 제대로 인지할 수 없는 정신병으로 몰아붙일 수만 있다면 인생, 아버지로 때문이라고 책임 전가하며 무기력하게 끌고 온 자기 삶을 하룻밤 사이에 바꿀 수도 있을 거 같다. 한 인간을 인간 아닌 동물로 격하시키기만 하면 돈과 미래를 손에 쥘 수 있다.


          "돈이냐 인간이냐? 둘 중에 하나, 무엇을 택할래?"라고 감독은 우리에게 단호하게 질문한다. 너무 섣부른 판단이다. 돈통에 빠져 산 지가 너무 오래되어 돈 냄새를 몸에서 지울 수 없는 인간인 우리가 태어날 때 '하늘로부터(?)' 선물로 받은 인간성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까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가 모두 심연에서 시작하는 떨림을 통해 알고 있는 인간성 되찾기는 '관계'에서 시작했다. 순호는 지우에게 접근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접근했다. 지우의 자폐증이 지우를 인간 이하로 격하시켰다는 걸 재판장에서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수집해야 했다. 그런 순호의 접근 속에 담긴 냉험하고 음흉한 냄새를 지우는 맡지 못했다. 지우가 태어나 이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으로 선택한 자폐증 때문이었다. 자기만의 세계를 세상으로 이해하며 그 속에서 사는 지우는 "돈과 인간"을 구별하지 못했다. 돈이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지우에게 필요한 건 오늘 하루도 학교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주치게 될 한 마리 개를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지나칠 수 있느냐였다. 어떻게 하면 맛있는 컵라면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느냐였다. 그런 지우의 삶 속으로 침범하려는 순호를 지우는 무감각하게 내쳤다. 인간 이하의 인간에게 성심껏 다가서는 자기를 당돌하게 매치는 지우가 미웠지만, 포기 없는 다가감 말고는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 없었다. 지우는 자폐증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세상과의 소통을 포기한 지우가 자기가 보고 듣고 확인한 상황에 관해 이 세상 그 누구보다 확고하게, 당당하게, 서있는 모습 앞에서 순호는 서서히 도대체 누가 자폐증 환자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세상과의 소통을 차단한 채 살아가는 지우의 모습을 바라바며 세상 속으로 그 누구보다 간절하게 뛰어들기를 갈망했던 순호는 그런 자기 모습 속에서 '진짜' 자폐증을 발견한다. 지우의 내면세계를 조금씩 알아갈수록 순호는 잃어버린 채 살았던, '동심'이라 이름 붙여 평가절하했던, 소중한 내적 능력을 재발견한다. 


            재판장에서 순호는 피고인이 아닌 지우를 변호했다. 지우를 변호함으로써 순호는 자기를 변호했다. 자기를 변호함으로써 순호는 자기 삶에 대한 영원한 증인이 되기를 서원했다. 그런 순호의 새로운 삶을 지우가 증인이 되어 주었고, 변호했다. 


          도덕경을 쓴 노자도, 신죽음의 신학을 세상에서 처음 시작한 니체도 인간 인격의 완성 단계를 '어린아이'라고 말했다. 기독교 정신의 핵심 가치를 세상에 알리고 떠난 예수 역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요건으로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너무 많은 생각은 몸에 해롭다는 흔해빠진 격언을 다시 한번 차분하게 곱씹어야 할 이유를 영화 <증인>은 내게 건넸다. 나보다 더 잘난 사람, 나보다 더 빠른 사람, 나보다 더 큰 사람, 나보다 더 뭐든 뛰어난 사람을 찾아 헤매다 마음의 공허감에 족쇄 채워지는 것보다는 나보다 조금 못난 사람 속에서 조금 더 나은 나를 발견하는 게 더 낫다는 공자의 말이 새롭게 다가온다.


          2000년을 시작으로 한국 영화는 은폐된 역사적 진실을 한국인에게 알리는 일에 일조했다. 영화 <증인>은 한국인에게 새로운 질문을 내놓았다. 오랫동안 은폐된 진실이 드러났다. 새롭게 안 진실을 가지고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아니,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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