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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 강물처럼 Sep 30. 2021

오징어게임(2021)

욕망의 마지막 정거장

어릴 때 친구들과 함께 놀아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거다. 오징어 달구지, 공기놀이, 구슬치기, 고무질, 숨바꼭질, 다망구 (경상도에서 사용했던 놀이 전문 용어). 그랬다. 놀기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엄마는 날 데리러 나오지 않았지만 친구들 엄마는 그랬다. 밥 먹을 시간이 되면 친구들 엄마가 하나 둘 나와 친구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혼자 놀 수는 없었으니, 친구들이 집에 가면 나도 집에 갈 시간이었다. 헤어지면서 친구들과 난 서로를 향해 말했다.


“내일 보자, 안녕!”


다음 날이면 우리의 놀이는 어김없이 다시 계속되었다.


          놀이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친구가 죽으면 내가 살았고, 내가 죽으면 친구가 살았다. 얼마든지 죽을 수 있었다. 새로운 놀이가 시작하면 언제든 다시 살아날 수 있었기 때문에.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경계선에 서서 행한 게 놀이였는데, 그걸 난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 놀이 속 삶과 죽음이 실은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실제적’ 죽음과 천만다행으로 살아남과 무척이나 유사하다는 걸 연속극 오징어게임(2021)을 보고서 오싹한 공포감을 통해 깨달았다.


          삶의 막다른 골목에 이른 사람들을 찾아가는 한 집단이 있었다. 이들을 삶의 막다른 골목으로 이끈 건 돈이다.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운이 없어서 돈이 손에서 도망간 사람, 새로운 도약을 위해 빌린 돈을 허무하게 잃기를 반복하여 쌓인 빚으로 인해 새로운 재기를 꿈꿀 수 없게 된 사람, 빚 독촉에 시달리다 결국에는 돈을 갚지 못하면 신체 일부분을 포기하겠다는 신체포기각서에 서명해야 했던 사람, 전문직에 종사했지만 한 번의 실수로 전문직 자격증을 한순간에 박탈당해 사회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사람,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아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된 사람에게 누군가 찾아와 명함을 한 장 건넸다. 명함에는 꼬일 대로 꼬여 풀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인생을 한 번에 뒤바꿀 수 있는 기회가 적혀 있었다. 여섯 가지 놀이에서 지지 않고 이기면 45억을 손에 쥘 수 있다.


          놀이 참가자는 총 456명. 456억이란 상금은 최후의 승리자만 가질 수 있다. 456억이 한 사람의 목숨을 1억으로 환산하여 모두가 죽었을 때 남는 돈이란 건 놀이 참가자들은 첫 번째 놀이를 시작하기 전까지 몰랐다. 놀이에 참가하기 위해서 지켜야 할 규칙은 세 가지. 하나, 시작한 놀이는 마음대로 그만 둘 수 없다. 둘, 놀이의 규칙을 철저하게 준수해야 한다. 셋, 참가자 중 과반수 이상이 놀이하는 걸 거부하면 놀이를 관두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첫 번째 놀이가 시작했다. 놀이 이름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술래가 벽 혹은 나무에 머리를 대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고 외치는 동안 움직일 수 있다. 술래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친 후 고개를 돌렸을 때, 움직이면 술래에게 들켰기 때문에 ‘죽는다.’ 여기서 ‘죽는다’는 말이 총살 당해 죽는 것일 수 있다고는 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징어게임을 보기 전까진. 놀이에서 진 사람은 그 자리에서 총살을 당했다. 다섯 번째 경기가 끝난 후 살아남은 이는 세 사람. 세 사람을 제외한 모든 참가자는 놀이에서 졌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죽었다.’ 다음 놀이에 다시 참가할 수 있는 부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후기자본주의가 인간을 데리고 간 곳이 어디인지를 오징어게임은 냉정하게 고발한다. 돈을 쫓는 인간은 결국 사람에게 쫓기게 되고, 돈을 좇다 사람에게 쫓기게 된 사람은 결국 다른 사람을 쫓아 죽임으로써 돈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손아귀에 쥐게 된다. 기회의 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다른 누군가가 그 사람을 뒤쫓고 있기 때문이다. 돈을 향해, 돈을 위해, 놀이에 참가한 참가자는 목숨을 담보로 한 놀이터 쳇바퀴를 달린다. ‘돈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대체 사는 게 뭐지?’라는 질문이 불현듯 마음에 떨어지면 천장에 매달린 돼지 저금통 속으로 떨어져 쌓여가는 돈뭉치를 바라보면 된다. 한 사람이라도 더 죽이면 저금통에 쌓이는 돈뭉치 수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사람과 쌓여가는 돈뭉치를 바라보면서 놀이 참가자는 자연스레 ‘저 돈만 있으면 이 모든 고통을 깨끗하게 잊을 수 있을 거야.’라는 환상에 기반한 신념을 확고하고 공고하게 다져나간다.


          독일 철학자 헤겔George Wilhelm Friedrich은 인간의 욕구를 세 가지로 구분했다. 식욕, 성욕, 인정욕. 다윈의 진화론도 생명체의 생명을 가능케 하는 두 가지 법칙을 제시하며 헤겔의 욕구에 찬성한다. 생명보존법칙과 종족보존법칙. 놀이에 참가한 모든 이는 인정욕을 포기했다. 굴곡 많은 삶은 다른 이로부터 받을 수 있는 인정의 가능성을 모두 제거했다. 한 번의 기회를 통해 어쩌면 새로운 인생을 꿈꿀 수 있다는 희망에 취해 택한 놀이터가 삶을 마무리하는 장소가 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종족보존 욕구 또한 포기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에게 유일하게 남아 있는 생명체로써의 욕구는 생명보존 욕구였다. 다른 이가 죽어야만 살 수 있고, 다른 이를 죽여야만 놀이에서 이길 수 있는 이들에게 주어진 ‘절대적 평등’으로 포장된 마지막 기회는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명보존법칙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이지만 인간이길 거부한 삶을 강요했다.


          뇌종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사는 한 할아버지는 돈을 사용하여 돈을 벌었다. 한평생 먹고 살 돈을 벌고 나니 사는 게 재미가 없어졌다. 원하는 걸 다 사서 입고, 먹고, 사용했지만 어느 것 하나 재미가 없었다. 재밌는 일을 모색하다 다다른 결론이 목숨을 담보로 한 어린시절 놀이 승자 진출전.


“여보게, 돈이 없는 사람과 돈이 많은 사람 사이에 공통점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아는가? 그건 둘 다 사는 게 재미가 없다는 점이야.”


여섯 가지 놀이에서 승리하여 45억을 상금으로 받고 일상으로 돌아간 456번 참가자가 일 년이 넘도록 은행계좌가 든 돈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놀이 협회 사장이 456번을 따로 만나서 물었다.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자네는 아직도 사람을 믿나? 그 사악한 일을 모두 경험한 후에도 아직 사람을 믿나?”


          456번. 사람을 믿었기에 직장을 잃었고, 사람을 믿었기에 아내를 잃었고, 사람을 믿었기에 딸도 잃었다. 엄마마저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 놀이에 참가했다. 456명 참가자 중 유독 다른 이를 향한 따뜻한 마음을 곳곳에서 내비쳤던 건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만 살아남는 생존 놀이터에서도 사람을 믿었기 때문이다. 신기한 건 사람을 믿었기에 456명 중 유일하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사람을 믿었기에 자기를 죽여서 우승하려 했던 함께 자란 동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박노해 시인이 쓴 책 한 권의 제목이 생각난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이어령 선생은 후기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생명자본주의라고 말했다. 생명자본주의의 시작은 돈(자본)을 뜻하는 캐피털capital이 본래 뜻인 ‘양의 머리(생명)’로 돌아가는데서 시작할 수 있다고 이어령 선생은 말했다. 오징어게임이 미국 저녁 시간 시청률의 압도적으로 통제하게 되자 이베이ebay에서는 오징어게임 참가자들이 입었던 하얀색과 초록색이 어쭙잖게 조화를 이룬 체육복과 달고나를 만들 수 있는 재료 묶음을 기획 상품으로 만들어 팔기 시작했단다. 후기 자본주의의 종착점을 날카롭게 파헤친 연속극은 기묘하게도 후기 자본주의를 채찍질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신선함과 역겨움, 흥미진진함과 씁쓸함, 호기심과 공포심이 공존할 때 마음은 불안정해진다. 오징어게임을 보고 나면 나도 모르게 처와 두 아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삐딱해졌다. 그 이유는 후기 자본주의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감이 오징어게임을 통해 내 마음을 엄습했기 때문이란 걸 이제 알았다.

 

2021년 9월 27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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