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도에서 꿈과 현실이 충돌했다. 옛날 옛적에.
2021년 백상 예술제에서 대상을 받은 영화라는 사실에서 생긴 기대감을 가지고 봤다. 고리타분한 학문보다는 실리를 추구한 조선 후기 정약용에게 형제 세 명이 있었다는 신선한 사실에 놀랐다. 1758년 4월 8일에 태어나 1816년 6월 30일에 생을 마감한 정약용의 둘째 형 정약전이 주인공이었다.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이들 네 형제에게 실리의 중요성을 안겨준 게 서양에서 동양으로 넘어온 천주교였다는 사실에 다시 놀랐고, 이들이 한반도 최초의 천주교도였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1801년 가톨릭 박해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된 신유박해(辛酉迫害)는 제사를 거부하는 서양 종교를 조선왕조를 위협하는 적으로 간주하여 조선 내 천주교도를 색출하여 처벌한 사건이다. 조선 후기 문관이자 실학자, 저술가면서 나중에는 생물학자로 변한 정약전은 1784년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았고, 이승훈(조선인 최초 천주교 영세자)이 주도하여 김범우(첫 번째 한국 가톨릭 순교자) 집에 세운 조선 최초 가톨릭 교회에서 동생 정약종과 정약용, 이병과 함께 주일 미사를 행하며 가톨릭 교리를 강론하며 사제직도 수행했기에 신유박해 때 전라도 흑산도로 유배 보내졌다.
흑산도는 정약전에게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자궁과 같은 공간이 되었다. 유학과 실학, 서양학 사이를 오가며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노력이 한 순간에 물거품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는 걸 목격했기에 흑산도는 암담한 마음과 암담한 현실이 하나로 모이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창대를 만났다. 양반 아버지와 흑산도 시골 여인네 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난 그는 자기가 처한 현실보다는 언제나 더 나은 현실을 갈망하는 젊은이었다. 바다에 뛰어들어 바다가 베푸는 은혜에 의존하여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창대는 혼자서 글을 익혔고, 익힌 글을 통해 현실로부터 도망쳐 잠깐이나마 꿈의 세계를 거닐 수 있었다. 꿈이 사라진 이와 꿈만 꾸는 이가 우연한 계기로 마주친 공간이 흑산도다.
정약전에게 허망하게 사라진 꿈만 같던 현실로부터 깨어나 진짜 현실이 무엇인지를 알려준 이가 창대라면, 창대에게 더 큰 꿈을 꿀 수 있는 날개를 달아준 이는 정약전이다. 유학도 실학도, 서양학도 옆으로 내친 정약전에게 남은 건 자기가 처한 하루였고, 살아내야 할 하루는 바다와 바닷가 생태계였다. 그곳에서 그는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조선 조정의 소나무 정책을 비판한 <송정사의(松政私議)>, 흑산도 홍어 상인 문순득의 기묘한 표류기를 기록한 <표해시말(漂海始末)>,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학 서적인 <자산어보(辛酉迫害)>를 쓴 곳이 흑산도다. 창대가 과거에 합격하여 정부 기관 말단 사원으로 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 곳이 흑산도다. 흑산도에서 한 사람이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눈을 돌렸다면, 다른 한 사람은 흑산도에서 현실에서 꿈으로 도망쳤다. 정약전과 창대, 이 둘은 하나가 될 수 없었을까? 정약전의 영근 열정과 창대의 집요한 열정이 조금만 더 조화롭게 어우러졌다면 자산어보는 정약전의 마지막 책이 아니라 새로운 학문을 향한 첫 번째 책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바라는 세상은 양반도 상놈도 없고 임금도 필요 없는 그런 세상이다."라고 정약전이 말했을 때, 창대는 마음을 돌렸다. 몸에 흐리는 양반의 피를 숨이 붙어 있는 한 최소한 한 번은 세상에 자랑하고 싶었던 포부는 임금이 있어야만 가능했기에, 왕의 존재를 거부하는 정약전을 창대는 인정할 수 없었다.
정약전의 실리가 인내와 여유를 갖추었다면, 창대의 무모함을 정약전이 조금 더 단호하게 꾸짖었다면, 지금 난 조금은 다른 세상에서 태어나 자라 살고 있지 않을까? 꿈과 현실이란 쉽사리 하나로 묶을 수 없는 두 가지가 흑산도에서 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