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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길 colour Jun 26. 2020

Drawing_유물

2020.06.17.물날













1996

빛바랜 추억을 소환하는

유물을 발견했다.


툴 페인팅을 하며 채 마무리 못한

작업물 한 귀퉁이에서 발견된 스테들러 연필세트.

이게 왜 구석에 처박혀 있던 건지 궁금해하는 중에도

익숙한 촉감이 손을 타고 심장으로 흘러들어

마음을 진정시키기 어렵다.


녹이 스며들어 부식된 뚜껑이 바스러질까

조심히 집어 들어 안을 살핀다.

길고 짧은 연필 한 자루, 한 자루가

25년 전의 기억을 꺼내 올린다.


젊고 활기찬만큼 깊이 우울했던 19살의 나로부터

25년만큼 멀어졌다.

그저 살아 있음에,

그나마 사람 구실 하며 삶을 계획하고 있음에,

스스로가 대견해진다.


유독 짧은 'B'와 '4B'를 보며

피식 웃음이 난다.

촌스럽고 고집스럽던 나에게

새파란 온기를 전한 점잖은 손이 떠오른다.

연필세트에 소박한 격려를 실어주었던

작은 관심이 한없이 고맙던 시절이 있었다.

'그림을 그릴 때가 가장 너답다'는 말에

울먹이며 받아든 몇 자루의 연필이

삶을 지탱하는 전부였던 그때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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