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생의 발견

깻잎 부인

by 이마리 정환

호주 와서 맨 처음 재미 본 농사가 깻잎이다. 밥 하다가 얼른 한주먹 뜯으면 훌륭한 한 끼 쌈이 된다.

한국인은 어쩔 수 없는 깻잎 민족. 쌈으로, 간장에 절여, 김치로 만들어, 탕에 넣어, 다진 고기 오물조물 속 넣어 납작하게 지져낸 깻잎 전으로 수만 가지 요리로 만들어내는 우리 어머님들 대단하셨다. 한국에서 평생 사 먹던 것을 여기와 내 손으로 농사지어 먹으니 내가 기특하고 자연이 고맙다.


남쪽 바닷가에 서머 하우스를 둔 호주 지인 교수가 여름이면 그 집을 우리에게 빌려준다. 고맙게도 깻잎 심어놓았으니 뜯어먹으라고 사진과 글까지 남겨주었다. 오미크론 극성이니 얼굴도 마주 못하고 고맙게도 열쇠는 우리의 비밀장소에 넣어놓았다.

교수가 보낸 깻잎 사진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고맙다는 문자 보내고 도착하자 야채밭으로 달려갔다. 역시 이곳 깻잎은 Perilla라고 동양마트에서 팔긴 하던데 우리 깻잎만큼 향이 좋지 않은 그 종류였다. 일본 깻잎은 한국 것과 모양은 비슷하나 거의 자줏빛이고 향이 독하고, 호주 교수가 심은 깻잎은 잎이 너무 너울거려 산발한 머리 모양이 한국 깻잎처럼 예쁘지는 않았다. ㅎㅎ 역시 우리 깻잎이 예뻐 앳된 여자애들 '깻잎머리'라는 어휘도 기막힌 언어의 창조라는 생각이 스쳐간다.

누군가가 그랬다.

-그악스러운 한국사람들. 한 뼘 땅만 있어도 깻잎과 상추 심느라... 쯧쯧.

나도 이 양반 말처럼 그악스러운 한국인이 되었다. 우리 집은 한국 슈퍼까지 고속도로로 한 시간 반은 달려야 가니 자연히 깻잎을 심을 수밖에.

시드니 외곽에 위치한 우리 집을 처음 온 선배가 그랬다.

-깻잎이 마당에 있기에 틀림없는 한국사람 집이라 묻지 않고 쳐들어왔어.

골목을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처음 보는 식물이라며 깻잎을 보고 묻는다. 나는 멋진 야채라고 대답한다.

-이거 멋진 야채. 코리안 허브, 깻잎이거든요. 얼마나 좋은 야채인데. 이 향 좀 맡아봐요. 좀 뜯어 드릴까요?

킁킁 냄새 맡던 노인 고개를 흔들고 웃으며 간다. 그렇지. 이 좋은 한국 깻잎을 호주 시골 노인이 어찌 알리요.

그 후로 깻잎 딸 때면 가끔 산책하는 할아버지를 만난다. 그분은 멀리서 손을 흔들며 "굿모닝, 미시즈 깻잎'이라며 호들갑을 떤다. 그런 그의 호칭이 싫지는 않다. 내 별명을 다시 고쳐 중얼거려 본다.

-토종 한국어 '깻잎 부인' 난 더 좋아.

호주는 기후가 좋아 그 자리에서 잎 주고 꽃 피워 씨를 만들어 절로 자라니 그 자리에 낡은 가지 치우고 물만 주면 새 순이 나 사철 깻잎을 딸 수 있다. 어찌 보면 미나리보다 더 강인한 한국인을 닮은 야채가 아닐까.

오늘은 작심하고 깻잎을 한 소쿠리 땄으니 깻잎 부인이 무슨 엉뚱한 요리를 창조할지 기대된다. 정통 요리는 못하는 깻잎 여사의 특기가 '국적불명의 요리사'이기 때문이다. 친정엄마가 딸이 요리하는 것 못마땅해 붙여준 별명이지만. ㅎㅎ 아무려면 어때.

그런데 어쩐지 깻잎 요리보다는 영화 [미나리]처럼 멋진 영화 [깻잎]이 탄생할지도 모르는 여름날이다. 남반구 호주에서 쓰는 [깻잎] 시나리오는 어떤 버전으로 탄생할까.

소쿠리를 안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는다. 진한 깻잎 향기가 가슴속 깊이 스며든다.

-흠흠, 두고 온 한국의 냄새다. 어젯밤 꿈속에서도 맴돌던 그 냄새.

깻잎이 화초 속에 섞이다. 이름 모를 들꽃이 자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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