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사지 패스/준레이크 루프/비숍 크릭
중부 캘리포니아, 정확하게 말하면 동부 씨에라 네바다(Eatern Sierra Nevada) 지역에 있는 호수들을 중심으로 가을 여행을 다녀왔다. 이 지역에는 호수가 너무 많아 빠짐없이 둘러보려면 몇 날 며칠을 돌아도 다 못 돈다. 게다가 호수들이 거의 높은 산에 있다 보니 자동차 도로가 뚫리지 않은 곳은 걸어 올라가야 하므로 사실은 호수들을 다 돌아보는 것은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이런 높은 산에 있는 호수들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잔 뮤어 트레일(John Muir Trail)인데, 이 산길을 걷는 일만 해도 사실은 서너 주가 걸린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그들 가운데 아주 조금 돌아보고 왔다.
캘리포니아에서 단풍 여행을 한다는 것은 결국 호수를 여행한다는 것과 거의 같은 말이다. 캘리포니아에서 단풍이 드는 나무는 대부분 아스펜(Aspen, 사시나무)이고, 사시나무가 자라는 곳은 물이 많아 땅이 촉촉한 지역이다. 그러므로 주로 호수나 산 등성이의 물길이 있는 곳, 전에 물이 흘러 조금이라도 물기가 남아있는 곳에서 사시나무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단풍을 보려면 산을 오르거나 호수를 찾아야 한다.
커사지 패스는 정확하게는 산봉우리는 아니다. 능선의 꼭대기 부분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캘리포니아 하이웨이 395번을 타고 북쪽으로 가다 보면 인디펜던스(Indepence)라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에서 어니언 밸리 길(Onion Valley Road)을 삼십 분쯤 올라가면 등산로 입구가 있다. 이곳에서 커사지 패스까지 다녀오는데 대여섯 시간쯤 걸리는데, 가는 길에 있는 호수에 들러 좀 쉬기도 하면서 노량으로 걸으면 조금 더 걸린다.
이곳은 일 년 내내 사람이 많이 찾는 곳이다. 커사지 패스를 다녀오는 트레일을 위해 오는 사람은 물론이고, 패스를 넘으면 이어지는 존 뮤어 트레일을 하려는 사람들이 대놓은 차들로 주차장은 항상 북적인다. 그런데도 사람을 찾기 힘든 까닭은 그 사람들은 이곳에 며칠 차를 대놓고 존 뮤어 트레일을 떠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주의할 점은 패스까지는 누구라도 갈 수 있지만, 패스를 넘어가려면 미리 허가(Permit)를 받아놓아야 한다.
커사지 패스는 해발고도가 높아(3,570 미터) 고산 증세가 나타날 수 있다. 고산 증세는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머리가 아프거나, 속이 메스껍기도 하고, 손이나 몸이 붇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미리 진통제를 먹거나 효과가 있다고 소문난 보조물을 마시거나 붙이거나 하기도 하는데, 그 효과가 검증된 것은 없다. 그러므로 트레일을 하다가 고산증세가 나타나면 좀 쉬엄쉬엄 무리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엔 그리 험하지 않아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고도가 높아서 그런지 다른 곳을 오를 때 보다 더 힘이 들고 좀 일찍 숨이 차오른다. 잠시 숨을 돌리면서 뒤를 돌아보니 산 아래로 펼쳐진 풍경에 넋이 나갔다. 멀리 주차장의 차들이 손톱만 하게 보이는 것을 보니 그래도 꽤 올라온 것 같기는 하지만, 아직 첫 번째 호수에도 못 왔다.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다 보니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등산로 옆으로 난 냇물이 나타났다.
커사지 패스를 오르는 동안 모두 다섯 개의 호수가 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하나하나 나름대로 특징을 가지고 있는 예쁜 호수들이다. 리틀 포돌 레이크(Little Phothole Lake), 길버트 레이크(Gilbert Lake), 플라워 레이크(Flower Lake), 하트 레이크(Heart Lake), 빅 포돌 레이크(Big Pothole Lake)가 그것인데,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호수는 리틀 포돌 레이크와 길버트 레이크고 나머지는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 있다.
■ 리틀 포돌 레이크(Littel Pothole Lake)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무렵 눈앞에 너럭바위가 나타나면서 그 아래로 신기한 풍경이 펼쳐진다. 주변을 둘러봐도 있을 법하지 않은 곳에 물길이 있고, 작은 웅덩이가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다. 너럭바위에 앉아 잠시 숨을 돌리면서 몸을 추스리기에 알맞은 곳이다. 호숫가에 난 활엽수들은 이미 노란 옷으로 갈아입고 겨울을 맞을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이 나무들은 사시나무는 아니지만, 가을에 잎이 노랑으로 물드는 나무 가운데 하나다. 호수로 흘러들어오는 물길이 눈에 띄는 것으로 보아 바로 가까이에 두 번째 호수가 있을 것이다.
■ 길버트 레이크(Gilbert Lake)
처음 만난 호수와 헤어지고 나면 곧바로 나올 줄 알았던 두 번째 호수는 그러나 몇 구비를 넘어 숨이 찰 무렵에야 그 자태를 드러냈다. 길버트 레이크는 산정호수 치고는 꽤 커 보였다. 배경이 되는 고산들에 눈이 오면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할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이번엔 눈은 없다. 이 정도의 고산 지대는 한 여름에도 눈이 올 정도로 기온 변화가 심한데, 보통은 구월부터 눈이 오기 시작해서 이듬해 오뉴월까지는 눈이 와서 저 멀리 큰 도로를 지나면서도 쌓인 눈을 볼 수 있다.
이 지역에서 주로 낚이는 물고기는 송어라고 했다. 이 날도 이 높은 곳까지 낚싯대를 가져와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을 여럿 볼 수 있었다. 호수의 북쪽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올라 바라보면, 가을빛에 물든 호수가 병풍처럼 드리운 산에 둘러싸여 산정호수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내고 있다.
산을 오르다 하늘을 보니 저 산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다양한 모양의 흰 구름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용이 하늘을 오르는 모습 같아 보이기도 하고 무슨 짐승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가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다시 솟아오른 구름은 이번엔 물방울 인양 방울방울 떠오른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다가 문득 산을 오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하트 레이크(Herat Lake)
하트 레이크는 생김새를 보고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누구나 보면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호숫가로 가까이 가기에는 땅이 너무 험해서 사람들은 호수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주요 지점에 머물며 아름다운 호수를 보기도 하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무거워진 다리를 쉬기도 한다. 불과 1마일만 더 가면 봉우리까지 갈 수 있다. 그런데 이 날은 사정이 생겨 아쉽게도 여기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나머지 1 마일 더 가야 마지막 남은 빅 포돌 레이크(Big Pothole Lake)를 볼 수 있는데, 참으로 아쉽고 아쉽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진한 아쉬움은 다음을 위한 커다란 힘이 되므로 이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준 레이크 루프는 매머드 레이크에서 북쪽으로 약 30분쯤 더 가면 된다. 여기서 북쪽으로 10분만 더 가면 요세미티 국립공원이다. 잘 포장된 도로를 약 17마일 돌면서 이곳에 있는 네 곳의 호수와 인근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네 곳의 호수는 서로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호수 사이에 물길이 나서 서로 이어져있다. 이 물길을 따라서 사시나무들이 모여 살고 있기 때문에 길을 가는 내내 노란 가을을 볼 수 있다. 길은 하나밖에 없다. 한쪽으로 들어가서 다른 쪽으로 나오면 루프를 다 볼 수 있고, 가다가 돌아선다고 누가 뭐랄 사람은 없다. 참고할 사항은 햇빛의 방향을 고려해서 입구를 정하면 좀 더 아름다운 단풍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여행은 북쪽 입구에서 시작했다.
■ 그랜트 레이크(Grant Lake)
루트의 북쪽에서 들어서면 처음 나타나는 호수가 바로 그랜트 호수다. 이 루트에 있는 호수 가운데 가장 크지만, 다른 호수들과 다른 점이 있다. 호수가 크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 루프에서 흐르는 물의 마지막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물이 흘러들어오는 입구 쪽에는 습지가 만들어져 있어서 사시나무, 물풀들, 그리고 다양한 물속 생물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 있다. 그곳에는 또한 사람들이 모여 플라이 낚시(Flying Fishing)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밖의 호수가에는 특이하게도 모래톱은 있지만, 사시나무 따위의 식물이 자라지 않는다. 까닭은 모르겠지만, 물이 있다고 다 나무와 수풀이 무성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물풀들 주변에는 사시나무들이 모여 살고, 마침 샛노란 단풍이 막바지를 향하고 있었다. 잔잔한 호수 수면에 비치는 노란 가을이 손짓하여 부를 때마다, 따가운 햇살에 촉촉해진 볼 위로 살짝 바람이 스친다.
■ 실버 레이크(Silver Lake)
실버 레이크는 아주 크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호수다. 이 말은 지난번 글에서 지적했듯이 어느 정도는 호수의 사유화가 진행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관광지로 이름이 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제법 커다란 야영장이 있고, 리조트와 배를 띄울 수 있는 시설이 되어있어서 이곳에서 뱃놀이는 즐기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호수 건너편에는 개인 소유의 건물들이 즐비하다. 그만큼 주변 경치가 뛰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사유화하는 것은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니다. 어쨌든 이 호수의 자연환경은 다양한 생물들이 살기 좋게 발달되어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관리를 잘해서 그렇겠지만 아직 호숫물은 맑고 깨끗하다.
사시나무는 네 개의 호수 가운데 여기에 가장 많은 것으로 보인다. 그랜트 호수와 마찬가지로 물이 들어오는 입구 쪽으로 물풀 밭이 들어선 것은 보니, 물풀들은 보통 물 깊이가 낮은 호숫가나 습지에서 잘 자라고 있다. 아무래도 이런 물풀이 많은 곳에 플랑크톤 따위의 일차 먹이사슬 생물들이 잘 자랄 것이다. 이 호수는 그만큼 건강하다는 뜻일 것이다.
■ 굴 레이크(Gull Lake)
굴 레이크는 아담하다. 주변에 수초가 잘 발달해 있고, 사람들의 접근이 어렵게 되어있어 자연이 잘 보존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찬찬히 살펴보면 여기도 이미 호숫가의 사유화가 상당히 많이 진행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수 건너편으로 보이는 언덕은 이미 들어선 건물들 말고도 공사가 진행 중인 곳이 여럿이 있었고, 사람들이 쉽사리 들어갈 수 없는 호숫가는 그러나 한편에는 배를 띄우거나 배를 댈 수 있는 시설이 되어있다. 거기에 호수와 바로 붙어서 야영장이 개설되어 있는 까닭에 성수기에는 이 때문에 물이 더러워질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호수 뒤편의 언덕으로 난 도로를 타고 가면서 내려다보이는 호수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가까이서 볼 때와는 달리 수초지대는 훨씬 더 넓고 보기에도 예쁘다. 건너편에 세워진 마을 어귀의 언덕에 올라 한참을 내려다보면서 이런 아름다운 자연이 훨씬 더 오랫동안 잘 보존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준 레이크(June Lake)
사람이 욕심을 줄여나간다면 줄인 만큼 자연은 더 건강해질 것이다. 좀 더 멋있고 아름다운 자연에 가까이 다가가거나, 그곳에서 무엇인가 즐거운 놀이를 하려는 것은 욕망 가운데 하나다. 이런 욕심을 채우려고 자연을 훼손하면서 길을 내고, 집을 짓고, 즐길만한 무엇인가를 세워놓는다. 어느 정도까지 되는지 명확하게 기준을 보여줄 수 없지만, 할 수만 있다면 자연을 망가뜨리지 않으면 좋겠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자연을 망가뜨리지 않으면서 오랫동안 함께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편하고 쉽게 다가가 아름다운 경치를 재빠르게 보고 물러서기 위해 자연을 망가뜨리면, 오래가지 않아 자연은 아름다움을 잃게 될 것이다. 편리와 이익을 좇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일을 빠르고 급하게 하게 되는 것이고, 그게 더 나가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지는 것이다. 기왕에 난 길이라서 즐겁게 다니고 오르락내리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까닭이다.
준 레이크는 지난해와는 다르게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서 보게 됐다. 가까이서 볼 때는 잘 보이지 않던 곳들도 보이고, 더 넓게 볼 수 있어서 좋다. 이곳은 정식으로 전망대로 만들어놓은 곳은 아니다. 길을 가다가 옆으로 빠지는 길이 있어서 들렸는데, 뜻하지 않게 이런 멋진 풍경을 보게 됐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나무들은 가지가 부러지거나 흠집이 나있고, 바위들에는 낙서가 돼있기도 하다. 어떤 이는 자기가 다녀간 것을 표시해놓기도 했다. 아주 작아 보이지만 넓게 보면 매우 걱정이 되는 문제들이다.
비숍 크리크에는 많은 호수는 물론이고, 야영장과 리조트 등이 널려있는 곳으로 비숍 시 관광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 잘 다듬은 도로로 연결된 호수는 물론이고, 그곳에서 시작하는 다양한 트레일을 하면서 볼 수 있는 호수, 호수를 이어주는 시냇물, 그 물줄기를 타고 자란 사시나무 숲까지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풍부한 곳이다.
■ 레이크 사브리나(Lake Sabrina)
해마다 단풍이 드는 때는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 그 해의 온도와 날씨, 강우량에 따라서 나무가 옷을 갈아입는 때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올해는 지난해 보다 조금 추운지 같은 날에 갔는데도 이렇게 다르다. 투정을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단풍이 드는 때가 해마다 다르니 언제 찾아가야 할지 해마다 고민이 된다. 물론 시정부에서 매주마다 단풍 소식을 알려주기는 하지만, 그네들도 해당 장소마다 정확하게 소식을 전하기가 어려우니 개략적인 비율로 알려준다. 이를 근거로 찾아가기는 하는데, 그러다 보니 이렇게 때가 지난 다음에 오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때 이르게 찾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단풍이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철이 지났으면 제철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으니 굳이 절정일 때에 딱 맞추려고는 하지 않는다. 어떤 때에 만나게 되든 그때마다 그들이 소곤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시나브로 그들에게 흠뻑 빠지게 된다.
■ 노스 레이크(North Lake)
노스 레이크는 매우 재미있는 곳이다. 호수가 높은 산에 있는데 포장을 하지 않은 좁은 산길인 데다 난간을 만들어놓지 않아 처음 가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용기를 내면 낭떠러지 아래로 아슬하게 펼쳐지는 멋진 경치를 보면서 오를 수 있다. 길이 좁아 차 두 대가 비켜갈 수 없는 곳도 있으니 앞을 잘 보면서 가야 한다. 이 호수는 해발 9,500피트(2,895미터) 높이에 있는데, 높은 만큼 낙엽도 빨리 진다. 근방의 다른 호수들은 보통 10월 중순이나 돼야 물드는데 비해서 노스 레이크의 사시나무는 9월 말부터 물들기 시작한다. 이 날도 단풍은 거의 다 지고 아주 조금 남아있었다.
이곳은 낚시를 즐기는 이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호숫가는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느라 만든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주로 송어가 많이 잡힌다고 하는데, 낚시하는 이들 옆에서 한참을 바라보고 있어도 고기를 잡는 현장은 한 번도 보질 못했다. 그렇더라도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물고기가 안 잡혀도 상관없다는 듯 그들은 그저 낚싯줄을 드리웠다 거뒀다를 반복하면서 그저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즐기는 것 같았다. 낚시는 한갓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 바람에 취하고, 햇살에 녹아들고 수면을 넘나드는 풍경에 취한다.
■ 사우스 레이크(South Lake)
사우스 레이크는 근처에 있는 호수들 가운데, 특히 비숍 크리크에 있는 호수들 가운데 가장 높다(9,768피트; 2,977미터). 이 정도 높이에는 단풍이 들만한 나무는 자라지 않는다. 이곳에는 주로 늘 푸르게만 보이는 침엽수들만 자라기 때문에 이 호수는 사실 단풍 구경을 하려고 온 것은 아니다. 단풍은 없지만 호수가 맑고 주변 경치가 아름답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지금도 눈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시월부터는 많은 눈이 내려 겨울에는 호수와 어울리는 설산의 풍경이 숨이 막힐 정도다.
이곳을 찾는 이들 대부분은 호수만 구경하려고 오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곳에서 시작하는 트레일을 하려는 사람들이다. 앞에서 소개한 커사지 패스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시작하는 '비숍 패스'트레일도 존 뮤어 트레일을 시작하는 곳이다. 말하자면 저 산 너머에 있는 새로운 세계로 가는 창문이라고 할 수 있다.
■ 위어 레이크(Weir Lake)
위어 레이크는 사우스 레이크와 아주 가까이 있다. 사우스 레이크가 흘러내려오다가 잠시 머무르는 곳이다. 정간지들이 가끔씩 본문에 싣지 못하는 내용을 별책으로 만들어 부록으로 발행하듯이 위어 레이크는 부록처럼 붙어있다. 그러나 사우스 레이크가 지니지 못한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이곳 역시 낚시 즐기는 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앞에서 소개한 루트 말고도 하이 씨에라(High Sierra) 지역에는 수많은 호수들이 널려있는데, 그들을 보려면 앞서 소개한 커사지 패스처럼 산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그 가운데 몇 개는 길이 닦여있어서 차를 타고 오를 수도 있는데, 콘빅트 레이크가 그 가운데 가장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한 번에 다 둘러보려면 많은 시간과 체력이 필요하므로 해마다 조금씩 다른 곳을 찾아 둘러보는 것도 방법이다.
■ 콘빅트 레이크(Convict Lake)
콘빅트(Convict)라는 이름에 얽힌 일화가 있다. 1871년 가을, 네바다 주 카슨 시(Carson City)에 있는 교도소에서 일단의 죄수들이 탈옥을 했다. 죄수들이 숨어있을 곳을 찾아 헤매다 이곳까지 흘러들어 숨어 지냈다. 그들은 총격전 끝에 결국 체포됐는데, 이후 이 호수는 콘빅트 레이크라고 불렀다고 한다.
빙하에 의해 형성된 이 호수는 가장 깊은 곳이 약 43미터에 이를 만큼 깊다. 깊은 만큼 호수는 다른 호수들과는 달리 물빛이 짙푸르다. 주변 풍경도 물론 멋있지만, 이곳은 송어 낚시로도 이름나 있어 호수 주변으로 강태공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또한 호수 바로 옆에 야영장이 마련되어 있어서 콘빅트 레이크의 가을빛을 담거나 쏟아지는 별 빛을 담으려는 사진사들에게 인기 있다.
마침 사시나무들이 막바지 단풍을 만들고 있었다. 때 마침 햇살은 조금씩 기울어 나뭇잎에 걸려있고, 살금살금 불어오는 바람에 물결이 살랑거린다.
■ 버클리 폰드(Buckley Ponds)
이런 만남이 좋다. 우연하게 찾아든 곳에 호젓하게 자리 잡은 이런저런 모습의 자연,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여러 생물들이 정겹다. 아직은 사람의 발길이 잦지 않아 발밑에선 먼지가 폴폴거려도, 흙먼지 날리며 지나치는 자동차들도 그저 사랑스러운 한낮의 풍경으로 다가온다. 거기에 하늘을 수놓은 구름이라니!
널찍한 들판에 농로처럼 포장되지 않은 길이 나 있을 뿐, 여기에 무엇이 있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떤 곳이라는 안내도 없다. 이곳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어서 마을 사람들 말고는 찾는 이들이 없다. 마을을 벗어나 그러나 무엇이 아름답다고 느끼기는 사람마다 다 다른 잣대를 가지고 있으므로, 어느 누가 버클리 폰드를 어떻게 보는가는 아주 그 사람에게 달려있다.
호수와 호수, 루트와 루트를 연결하는 도로를 다니다 보면 그 길들 사이사이에 또 다른 길이 있고, 그 길가 어느 냇가에는 여지없이 사시나무들이 모여 산다. 그들이 모여사는 모습이 너무 예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해서 짬짬이 들렀다. 그러나 그들 모두를 하나하나 만나보는 것은 너무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므로 그 가운데서도 특징이 있는 몇 곳만 따로 설명은 하지 않고 사진으로 소개한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하이 씨에라의 험산준령들이 그저 아름다워 보이기만 해서 이 또한 이번 여행의 즐거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