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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에 홀리다 Mar 13. 2017

길 떠나기 좋은 계절

자이온 국립공원(Zion National Park), 유타


"좀 다른 선택을 해 보는 것은 어떨까?"

개인적인 취향이기는 하지만, 여행을 다니다 보니 번잡한 관광지보다는 한적하지만, 볼 것도 많고 배울 것도 있는 곳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북적이는 사람들 가운데 서로 부딪치며 관계를 맺고 그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고 느끼거나, 그도 아니면 그저 낯선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어떠한 여행을 하든지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겠지만, 많은 이들의 선택과는 조금 다른 선택을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한다. 


떠나는 길에서 나누는 정담도 좋겠고, 잠시 쉬었다 가는 곳의 정취에 취해 예정보다 좀 더 머물다 가는 것도 좋겠다. 바삐 움직여 다녀온 곳 목록을 늘려나가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겠지만, 눈에 띄는 괜찮은 곳에서 예정에도 없던 식사 한 끼 해결해 보거나, 지나는 길손을 유혹하는 한 조각구름을 따라 샛길로 나서보는 것은 어떨까? 물론 딱히 정해진 계절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내 취향에 맞는 계절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자이온 국립공원을 가기 위해 15번 프리웨이에서 내려 9번 지방도를 타면 왼쪽으로 보이는 공원이 하나 있다. 퀘일 크릭 주립공원(Quail Creek State Park)이 바로 그곳이다. 호수 주변엔 따뜻한 햇살도 쐬고 낚시도 즐기려는 인근 주민들이 많이 보인다. 낚시는 물론이고 개인 보트를 가져와 뱃놀이를 즐기는 사람들도 종종 눈에 띈다. 자이온에 갈 때마다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잔잔한 수면 위로 낮게 나는 새들의 비행과 유유히 떠있다 급히 자맥질하는 물오리들, 저 멀리 보이는 눈산, 그 눈산을 넉넉히 비춰주는 호숫가는 이곳을 그냥 지나치기 어렵게 하는 풍경이다. 


반영된 산그림자는 실제의 산보다 황홀하게 보인다. 수면의 물결에 따라 때로는 수채화로, 때로는 유화로 살랑거릴 때마다 그저 이 호숫가에 자리를 깔고 몇 시간이고 앉아있고 싶어진다.


퀘일 크릭 주립공원에서 보이는 눈산을 배경으로 하여 둘려있는 붉은 산은 레드 클리프 국립보호구역이다. 붉은 바위를 타고 넘는 트레일이 있고, 야영을 할 수 있는 캠프 그라운드가 개설되어 있어 하루 정도 머물며 자연과 어울릴 수 있는 곳이다. 오래전에 이곳에 정착하여 살던 사람들의 거주지를 보존하여 당시의 상황이 어땠는지 알려주고 있다. 그러니까 이곳은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접경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보호구역의 전경과 보호구역 안에 있는 사적지.


그동안 자이온 국립공원은 두 번 다녀왔는데, 공교롭게도 두 번 다 겨울이었다. 작년 2월에 다녀오고 그 해 말일에 또 갔으니, 한 해의 시작과 끝을 자이온에서 보낸 셈이다. 일부러 그러자고 계획해 둔 것은 아니며, 그럴만한 까닭도 없다. 다만 공교롭게 그리 되었을 뿐이다. 


보통 많은 사람들은 주로 여름과 가을에 집중해서 다녀온다. 그만큼 볼 것이 많고, 할 것도 많고, 즐길 거리도 많다는 반증일 것이다. 여름의 자이온은 트레일과 캐녀니어링(Canyoneering)의 천국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계곡 트레일이 개발되어 있다. 게다가 주변과 연계하여 짧은 트레일부터 장기간의 트레일까지 원하는 대로 즐길 수 있다. 또한 가을의 자이온은 또 어떤가! 눈부실 정도로 화려하게 물든 단풍이 보여주는 그 아찔한 풍경들은 실로 말로 표현할 수 조차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자이온의 겨울 풍경, 헐벗은 나무들이 가을에는 단풍이 드는 종류의 나무들이다.


"자이온의 겨울은 오묘하다"

 반면에 자이온의 겨울은 오묘하다. 해가 났든 나지 않았든 상관없이 그들이 보여주는 풍경은 말로 다 하기 어려울 만큼 멋지다. 잎이 다 진 앙상한 단풍나무(사시나무)들이 햇빛을 받으면 그 가지들이 영롱하게 반짝거려 마치 상고대처럼 보인다. 햇볕이 쨍쨍한데 상고대라니! 눈이 없어도 햇빛 반짝이는 눈 풍경을 볼 수 있는 셈이다. 푸르르거나 단풍이 든 잎이 무성할 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일상의 삶에서 가지는 많은 기대감들이 하릴없이 흔들리거나 무너져 내릴 때가 종종 있다. 그 이유가 분명하다면 그래도 좀 나을 텐데 대부분의 경우는 기대가 터무니없는 것도 아닌데, 뚜렷한 이유도 없이 흔들리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할 때가 있다.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뭐'라고 체념해버리면 마음이야 좀 편하겠지만, 결과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러다가도 기대도 하지 않았던 것이 너무도 쉽게 성사되는 반대의 경우가 있기도 하다. 이런 순간이 오면 그동안 누적됐던 피로가 한순간에 날아가버린다. 


그렇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살아가는 데 오르막이 있으면 또한 내리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으면 또 오르막이 오게 마련이다. 여행도 그런 것 같다. 항상 좋거나 항상 나쁘거나 한 경우는 별로 없지 않은가? 하나가 부족하면 또 다른 무엇인가가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 결국 하나로 되는 원리가, 여행에서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다. 


나목이 가득한 자이온의 겨울은 특이한 경험을 안겨준다.


"겨울 여행은 이런 맛이지!"

그러나 해가 나지 않는 날이라도 자이온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구름이 낀 흐린 날엔 소슬하기도 하고,  쓸쓸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다 느닷없이 눈이라도 내리거나 날씨의 변덕으로 높직한 봉우리에 운무라도 걸치면 어찌 다 말로할 수 있을까. 게다가 하얗게 눈 덮인 냇가, 귓불이 살짝 시릴 정도로 부는 시원한 바람, 이것들이 빚어내는 시린 풍경은 겨울 여행이 보여줄 수 있는 고갱이다. 


 눈 때문에 높이 오르지는 못해도, 너무 시리도록 차가워 물길을 따라 걸을 수는 없어도, 얼어붙은 바위와 미끄러운 길을 따라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지는 못해도, 갈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자이온 국립공원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은 자이온만이 아니라, 자연이 다 그런 것 같다. 그곳에서 우리가 자연에 해코지를 하지 않으면, 그들은 언제나 우리를 반기고 자신을 살포시 드러내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문제의 근원은 항상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역사를 면밀하게 검토해본 것은 아니지만, 진화의 과정에서 영장류가 지구의 환경에 끼친 여러 가지 폐해를 손꼽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여행할 따름이겠지만, 우리가 무심코 던진 돌에 엉뚱하게 다른 생물들이 피해보지 않도록 늘 조심하고 살피며 다녀야겠다. 




"무차별적 개발이 인간을 초라하게 만든다."

자이온 국립공원은 이름이 널리 알려진 국립공원이다. '국립공원'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근사한 자연 풍경 말고도 그곳을 찾는 방문객들을 위한 다양한 위락시설과 편의시설, 북적이는 사람들, 복잡한 교통 등등. 자이온을 가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그런 국립공원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자이온 국립공원은 소위 위락시설은 많지 않다. 그나마 공원 입구에 숙소와 캠프장이 있고 공원 안으로 들어가면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화장실, 피크닉 테이블 몇 개 정도다. 물론 공원 관리는 철저하다. 공원 안에 있는 하찮아 보이는 것이라도 함부로 반출할 수 없다. 등산로에 쓰러진 나무도 일부러 치우지 않고 통행에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로만 손을 보는 정도에 그친다. 나머지는 자연이 처리할 때까지 놔둔다.  


맨 처음 국립공원을 갔을 때 느꼈던 그 허망한 느낌은 지금도 잊히질 않는다.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국립공원에 대한 생각 때문에 기대했던 것이 어긋났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이런 자연 친화적인 태도가 자연과 인간이 잘 어울려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개념 없이 개발된 자연이 결국에는 돌아서서 퍼붓는 맹공 앞에 인간은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 


내로우스 입구, 자이온 국립공원의 마지막에 있는 내로우스 트레일 헤드의 겨울


겨울이 깊어가고 있다.
비록 눈이 없을 수도 있고, 구름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겨울에 길을 떠날만한 것은 여름과 가을의 떠들썩한 풍경이 잦아들고
이제 좀 조용히, 그리고 조금은 외로이 길을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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