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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에 홀리다 Oct 10. 2019

미국의 비경, 모압 피셔 밸리

구름이 머무는 곳

여행의 이유

어디를 가고 무엇을 볼 것인지를 결정하려면 이것저것 살펴야 할게 많다. 아무래도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와~!' 하는 감탄사가 나오느냐다. 감각에만 의존하는 것 아닐까?  아니다. 어떤 논리대로 추론해서 내린 결론을 따라 결정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결정을 내려야 할 상황에서 '생각해보겠다'는 말은 사실은 논리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려고 근거를 수집하고 논리를 개발하여 그 논리가 정황에 맞는지 등등 추론을 해보겠다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무엇인가 탁, 꽂히는 것이 있는지 살펴보겠다는 말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낫다. 어떤 결정을 하고 결정의 이유를 설명할 때, 겉으로 그럴듯해 보여 꽤 합리적인 결정으로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라도 눈여겨 살펴보면 그 뒷면에는 결국 원초적인 인간의 본능과 판단이 작용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감탄사가 터지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무엇인가 끌리는 감각적인 것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 동영상을 보다가 또는 사진이나 그림을 보다가 그리고 아주 가끔씩은 거칠고 격정의  단어들이 춤추는 여행 글을 보다가 그들에게 넘어간다. 


그곳, 모압(Moab)

유타의 중부에 있는 마을 가운데 '모압'이라는 곳이 있다. 인구는 고작해야 5,000명에서 6,000명 즈음이고, 차로 마을을 가로지르는 데 빨간 신호 다 걸려도 10분이면 넉넉히 지날 수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그러나 사실 모압은 꽤나 이름이 많이 알려진 곳이다.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무려 국립공원이 두 개나 있기 때문이다. 아치스와 캐니언 랜즈 국립공원, 이 두 국립공원만으로도 연간 방문하는 사람이 수십만을 헤아린다. 거기에 캐니언 랜즈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데드 호스 포인트 주립공원도 있고, 콜로라도 강과 그린 강이 흐르며 만들어낸 절경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기 때문에 야외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들락거린다. 오프로드 사파리 루트가 잘 개발되어 있고, 산악자전거 길이 사방에 흩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래프팅이나 카약, 점핑 등의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사시사철 찾아들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모압 시내에 있는 RV Park/Sand Flats Recreation Area/모압 주변의 흔한 풍경


목적지는 모압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어니언 크릭(Onion Creek)이다. 작은 냇물이 흐르는 계곡 사이로 차 두 대가 비켜가지 못할 만큼 좁은 흙길이 나 있다. 이 길을 따라가며 경치를 보거나 널찍한 어느 곳에서든 잠깐 짬을 내 구경하며 노량으로 늘어지며 게으름을 피울 수도 있다. 길을 따라 약 10여 마일 오르다 마지막 언덕을 넘으면 눈 앞이 확 트이며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다. 이곳은 피셔 밸리(Fisher's Valley)라는 곳이다. 이곳을 통과하여 계속 여행을 할 수 있도록 여러 갈래의 길이 이어져있다. 이렇게 어니언 크릭에서 시작하여 다시 모압으로 연결되어 콜로라도 강까지 이어지는 오프로드 길을 로즈가든 힐 사파리 루트(Rose Garden Hill Safari Loot)라고 한다.

어니언 크릭이 시작하는 곳


어, 저기 좋은데!

길을 가다 보면 스쳐 지나는 길가 풍경이 마음을 사로잡아 뒷목을 잡아 끌 때가 있다. 그냥 지나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은 풍경들 말이다. 여행을 하면서 정해놓은 규칙 가운데 맨 처음은 이런 경우 '우선 멈춤'이다. 비록 목적지로 가는 시간이 늦어진다고 해도, 설령 때를 놓쳐 끼니를 걸러도 괜찮다. 규칙을 정하게 된 것은 여행의 경험에서 온다.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대부분, 이런 경험이 한두 번쯤은 있을 것이다. 멈추고 보면 아주 평범하거나 전에 어디선가 봤을 법한 곳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멈추지 않았다면 두고두고 아쉬웠을 풍경들이 있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을 좀 덜 남겨두고 싶어서 정해놓은 규칙이다.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노량으로 가다 보면 뜻하지 않게 좋은 일도 생긴다. 어슬렁거릴수록 풍경은 더 가까이 다가온다. 레베카 솔닛이 걷기에 천착했던 까닭 이리라.


모압으로 가는 길 어디 쯤에서 샛길로 빠져 보게된 아름다운 풍경들(Miller's Canyon)


삼 년 전 어느 날, 낮 동안 아치스에서 시간을 보내고 저녁이 되어 야영할 곳을 찾아 나섰다. 캠프 그라운드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놨고, 선착순이었으므로 자리가 남아있지 않을 것에 대비해 몇 개의 캠핑장을 물색해 두었다. 바로 이곳, 피셔 밸리로 올라가는 길목이 되는 어니언 크릭의 들머리와 잇닿아 있는 콜로라도 강변이었다. 강변엔 양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야영장이 있으니 그 가운데 자리 하나쯤은 있겠지. 그런데 아뿔싸! 어두운 캠핑장을 샅샅이 돌았지만 우리 몸 하룻밤 눕힐 자리는 남아있지 않았다. 어쩌겠는가? 그 뒤로 한 시간여 헤매다 겨우 잘 곳을 찾았었다.


그런 곳을 다시 찾았다. 어니언 크릭은 그 길에서 시작한다. 지난번엔 생각도 못했던 곳에서 캠핑을 하기로 했다. 그 길 들머리엔 캠프 그라운드가 두어 개 있다. 선착순이라서 쓱 한 번 둘러보니 여름이 살짝 지나서 그런지 자리는 많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여기에서 잘 생각은 없었다. 그동안 그랬듯이 디스 퍼스 드 캠핑(Dispersed Camping)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프리미티브 캠핑으로 소개했지만, 그보다는 디스퍼스드 캠핑으로 부르는 것이 좀 더 일반적인 것 같아 용어를 바꿨다)


디스퍼스드 캠핑(Dispersed Camping)이란?

디스퍼스드 캠핑은 캠프 그라운드로 개발되지 않은 곳에서 캠핑을 하는 것을 말한다. 장소만 있을 뿐 일체의 시설이 없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모두 가져가야 한다. 때에 따라서 캠프 그라운드는 만들어져 있는 곳도 있다. 그런 곳도 시설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데서나 캠핑을 할 수는 없다. 일정한 규칙이 있기 때문에 이 규칙을 잘 준수해야 한다. 상세한 규칙은 미국 산림청에서 제공하는 디스퍼스 캠핑 준칙을 참고하기 바란다. 이 준칙은 미국 국토관리청(BLM)에서 관리하는 지역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국립공원이나 국립유원지, 국립 역사유적지 또는 야생동물 보호구역 등에서는 보다 엄격한 규칙이 적용되기 때문에 이런 지역을 방문할 계획이라면 미리 해당 지역의 홈페이지에서 관련 사항을 숙지하고, 필요한 허가를 미리 받아야 한다.
모압으로 가는 날 밤에 머물렀던 캠핑 스폿. 디스퍼스드 캠핑의 모습이 대략 이렇다. 오른쪽은 캠핑 스폿 옆으로 흐르는 개울물


콜로라도 강변에서

어니언 크릭을 오르기 앞서 콜로라도 강변을 따라 천천히 둘러볼 수 있었다.

해는 이미 기울어 서녘 하늘엔 붉은 기운이 감돌고

붉은 땅은 빛살을 맞아 그들대로 온통 빛투성이가 되었다.


강물은 빛살이 겨워 넘실거리고,  

나뭇잎은 반가워 살랑댄다.

누군들 마다할 수 있을까?

누구라고 거부할 수 있을까?


빛이 내리니 땅이 하늘이 되고,

빛이 내리니 이 불타오른다.


유타 지방도로 128번은 콜로라도 강을 따라 난 길이다.  경치가 아름답기로 이름난 이 길 옆으로 수많은 캠핑장이 있다.


해질녘, 128번 도로 옆의 콜로라도 강의 풍경


어니언 크릭의 빛잔치

어니언 크릭을 오르기 시작했다. 기울 대로 기운 햇살이 골짜기 깊숙이 내렸다. 처음엔 지나는 차가 한 대도 없는 데다, 날도 어둑해지니 살짝 겁이 났다. 길이 어떤지 모르니 마냥 좋다고 앞으로 가기가 꺼려졌던 것이다. 그렇게 길 한 옆에 차를 세우고 잠시 주춤하는 사이 지프 한 대가 앞서기 시작했다. 그제야 좀 안심이 됐다. 좀 앞서기는 했지만 우리 말고도 이 시간에 골짜기를 오르는 사람이 있으니 꺼려지던 마음이 사라지고, 그제야 주변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저녁 햇살이 붉은 사암을 어루만지자 골짜기엔 황톳빛으로 가득 차 눈앞에 어른 거렸다. 울끈불끈 한 바위 덩어리 사이사이로 스민 햇살이 붉게 물든 그들에게 뚜렷한 그늘을 만들어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다. 이미 어둠이 내린 모퉁이를 돌아 아직 햇살이 남아 반짝이는 곳에 이르면 골짜기는 다시 또 불타오른다. 높은 덩이는 하늘을 향해, 낮고 굵직한 덩어리들은 골짜기 깊이 은밀한 곳을 향해 자신의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계곡물을 건널 때마다 차바퀴에서 들리는 상쾌하고 시원한 물소리가 더해지니 온 몸의 감각들이 들떠 아우성이다. 희미하게 꼬리를 말고 있는 햇살을 좇아 천천히 그러나 부지런히 골짜기를 오르며 내리는 빛줄기들에게 눈인사를 건네본다.

어니언 크릭의 여러 모습들


어니언 크릭은 구불구불한 길을 오르며 양 옆의 바위 절벽이 빚어낸 절경을 볼 수 있는 오프로드 길이다. 길이 좁고 포장되지 않아서 먼지는 많이 나지만, 그렇다고 길이 몹시 험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 길은 사륜구동이 아니라도 차고가 높은 SUV면 충분히 오를 수 있다. 혹시라도 아치스 국립공원이나 모압에 들릴 일이 있다면 한번 다녀갈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어니언 크릭을 오르는 길은 먼지가 많이 날리지만 그리 험하지는 않다.


피셔 밸리의 하룻밤

해가 서산 너머로 넘어갈 무렵, 드디어 골짜기가 끝나고 지금까지 본 것과는 판이한 곳이 나타났다. 널따란 풀밭일 것이다. 해는 이미 산머리를 넘고 있었기 때문에 사방 구분이 잘 안됐지만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귓불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다르고, 냄새가 다르고, 느낌이 달랐다. 어둑하나 어슴프레 앞이 탁 트인 것이 보인다. 얼른 차를 세우고 서산마루를 보니 매직 아워의 하늘이 놀랍도록 아름다운 빛을 뿌리고 있다.

피셔 밸리 입구에서 바라본 어니언 크릭의 노을


첫머리 빈 터는 이미 다른 이가 자릴 잡았다. 이런 널따란 초원의 가운데 초지에서 캠핑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초원의 가장자리를 둘러보기로 했다. 길이 생각보다 험하다. 흔들흔들 덜컹덜컹 한동안 초원을 가로질러 가다 꽤 괜찮은 야영지를 발견했다. 전에 만든 화덕도 있고 커다란 바위 옆이 텐트를 칠 만큼 편평하기도 해서 여기서 야영을 하기로 했다. 서둘러 텐트를 치고 끼니를 해결하니 어느덧 하늘엔 셀 수도 없을 별들이 점점이 수를 놓았다. 아! 때마침 은하수가 보인다. 이런저런 위치에서 사진을 찍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밤이 깊었다. 이런 바람의 느낌이 좋다. 풀벌레 소리, 이따금 들리는 들짐승 소리, 하늘에 박힌 은가루들의 속삼임까지 야영지의 밤이 주는 은총에 가까운 특혜에 그저 고마울 뿐이다. 넓은 초원에 달랑 우리만 있다는 생각을 하니 덜컥 겁이 나기도 했으나, 자연의 은총에 비할 바가 아니다.

사실 그동안 은하수 사진을 찍어보질 못하다 이번에 처음 찍게됐다. 지금 생각해도 설레는 그 날, 그 밤의 하늘 풍경


아침 해가 밝았다. 밤새 가장 궁금했던 것이 여기가 얼마나 넓을까 하는 것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주변을 살폈다. 과연 생각했던 대로 널찍했다. 뿐만 아니라 초원엔 푸르른 풀들이 뒤덮인 데다 저쪽 산 아래 가까운 곳은 들꽃이 흐드러져 장관이다. 아침 햇살을 받은 바위 산들이 마치 스스로 빛을 내는 물건처럼 불그레 반짝이는 모습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지금 보고 있는 이 모습을 다음에 또 와도 보리라고 단정하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철을 따라 와 보면 그때마다 옷을 갈아입은 모습이 판이해 전혀 다른 곳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곳을 다시 가보는 까닭은 처음의 느낌이 강렬해서 다음에 또 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다.

구름 한 점 없던 피셔밸리에 불과 반시각 사이에 구름이 잔뜩 몰려왔다


피셔밸리의 다양한 풍경들



끝난 듯 보이는 길도 어딘가에서는 다른 길과 이어져 만난다. 거기부터 새로운 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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