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가주의 오월은 보랏빛
어릴 적 내 고향의 오월은 온통 흰색이었다. 조팝나무, 산딸기 꽃, 찔레꽃, 각종 과일나무, 토끼풀, 아까시나무까지 산과 들은 온통 하양 꽃으로 물들었었다. 특히나 진한 냄새를 풍기는 아까시나무의 꽃은 맡아보지 못한 지 벌써 수십 년이나 지났는데도 기억에 남아 있을 정도로 흔하기도 했고, 흐드러지기도 했다.
캘리포니아의 오월은 온통 보랏빛으로 물들어있다. 어딜 가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자카란다(Jacaranda)의 계절이 돌아왔다. 꽃말이 '화사한 행복'이라지? 꽃말에 어울리게 꽃의 빛깔도, 꽃의 모양도, 그리고 꽃냄새까지 화사하고, 때론 화려하게 보인다. 꽃 모양은 한눈에 보면 오동나무 꽃과도 닮았다. 종 모양에다 보랏빛, 게다가 오월에 만개하는 꽃 자카란다. 자카란다 꽃 이름이 입에
설을 때 어떤 분이했던 농담이 기억에 남아있다. '자카란다 '가 생각나지 않으면, '자 가련다'로 기억해 내면 된다는 뭐, 아주 올드한 농담이었지만, 단기 기억이 짧은 내게는 그나마 자카란다를 기억해 낼 수 있는 유일한 촉매제였다. 남가주의 어느 도시를 가도 사월 말쯤부터 피기 시작하는 자카란다를 볼 수 있을 만큼 가로수로, 정원수로 애용되고 있는 나무다.
그러나 남가주에서 한국의 벚꽃처럼 자카란다가 대규모 군락지로 조성된 곳이 없어 좀 아쉽다. 지자체별로, 아니면 마을 단위로, 그것도 아니면 개별적으로 거리에 심거나 집 앞 뜰에 심은 정도다. 그런데도 어딜 가나 흔히 볼 수 있을 만큼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자카란다의 꽃잎은 통 꽃잎이라 꽃이 지면 커다란 꽃잎이 떨어진다. 이 말은 자카란다가 지기 시작해도 꽃비가 내리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벚꽃은 꽃잎이 지기 시작하면 마치 꽃비가 내리는 것처럼 보여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자카란다는 그런 낭만은 맛볼 수 없다. 수북하게 쌓여있는 바닥의 꽃잎을 보노라면 왠지 서글픈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것은 아마도 꽃잎이 크기도 하고 빛깔이 꽃말처럼 그렇게 화사하지만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곧 여름이다. 기온은 이미 여름을 방불하지만, 식물들은 아직 봄의 막바지에서 여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자카란다 꽃이 다 지고 나면 짙푸른 잎들이 무성해져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줄 것이다. 우리는 또 그 그늘을 방패 삼아 불볕더위를 잘 견뎌낼 것이다. 아직은 봄이다. 공원 한편에 가득한 자카란다 나무 사이로 떨어진 보랏빛 향기를 맡으며 여유로운 호흡으로 하루를 보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햇살 따스한 봄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