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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에 홀리다 Mar 16. 2018

꽃길

Blossom Trail, Frezno, California

캘리포니아 중부 프레즈노(Frezno)는 넓고 비옥한 농지가 있어서 이곳에서 생산한 다양한 농산물은 전국 각지로 공급된다. 특히 이곳에서 나는 오랜지와 포도는 세계에서도 이름을 얻을 만큼 대규모로 재배되고 있다. 캘리포니아 하면 오랜지가 떠오를 만큼 오랜지는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농산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 말고도 또 하나의 대표적인 농산물이 있다. 바로 캘리포니아 아몬드다.

중부 캘리포니아 레딩에서부터 베이커스 필드에 이르는 드넓은 분지 지역을 센트럴 밸리(Central Valley)라고 일컫는데, 무려 길이가 750km에 다다를 만큼 넓은 지역에서 갖가지 농산물이 생산되고 있으며 아몬드도 그중 하나다. 캘리포니아의 아몬드는 전 세계 아몬드 생산량의 87퍼센트를 차지한다. 그리고 미국 내에서는 오직 이곳 캘리포니아에서만 아몬드 농사를 지을 수 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몬드 나무가 자랄 수 있는 기후에 적합한 지역이 캘리포니아, 그것도 중부 캘리포니아의 센트럴 밸리라는 이야기다.

지난 주말에 중부 캘리포니아 도시 가운데 프레즈노(Frezno)에 있는 아몬드 농장을 다녀왔다. 아몬드 나무는 겨울에 해당하는 11월 즈음부터 꽃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해서 겨울을 지나 2월 중. 하순에 꽃이 핀다. 아몬드 꽃은 대체로 2주 정도의 개화기가 지나면 일제히 꽃이 지므로 혹시라도 꽃을 보고 싶다면 2월 마지막 주가 최적기이고, 그다음 주는 삼분의 일 정도의 꽃이 남아있으므로 서둘러야 한다. 이번에는 3월 첫 주에 다녀왔기 때문에 이미 대부분 농장은 꽃이 졌고, 서너 개의 농장에서만 꽃을 볼 수 있었다.




봄,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말이다. 어느 철이든 그만 가진 남다름이 있기 마련이고,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 겨울엔 날이 추워야 하고, 이따금 된서리도 내려야 제맛이다. 게다가 눈까지 내린다면 제대로 된 겨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눈이나 서리가 없다고 겨울이 아닌 것은 아니다. 눈 대신 비가 내리고, 서리 대신 이슬이 내려도 겨울철이다. 봄이 오면 꽃이 펴야 마땅하지만, 꽃이 폈다고 다 봄이 왔다고 할 수는 없다. 날이 좀 따스한 겨울엔 철 모르는 풀들이 꽃을 피우기도 하고, 웃자란 풀들은 봄과  엇비슷하다. 


그런데 이제는 봄이 아니라고 말하기 어려워졌다. 꽃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꽃대궐이라고 해야 할까? 지난 해 보았던 야생화 무리와는 또 다른 느낌을 주는 나무에 흐드러진 꽃무리의 정체는 바로 아몬드 꽃이다. 마치 벚꽃을 떠올리게도 하는 아몬드 꽃은 모양과 빛깔도 벚꽃을 닮았다. 꽃이 흐드러졌다는 말은 이런 때 써야 제맛이다.


마치 눈이 내린 것 같은 이 꽃무리를 보고 어찌 빈말을 할 수 있을까! 그저 외마디를 외치는 일 말고 달리 말이 필요할까? 지난겨울의 차가운 기운을 견디며 지켜온 꽃봉오리들이 볕이 따스해지면 한꺼번에 꽃망울을 터뜨리며 외친다. '야호, 봄이다!'




긴긴 겨울을 잘 견뎌냈으니, 터뜨리는 꽃봉오리마다 예쁘지 않을 수 없다. 겹겹이 쌓인 겨울을 벗고 짧디 짧은 삶을 산화하는 그들은 꽃잎을 떨군 뒤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삶을 준비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아몬드 꽃은 그저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내는 미셀러니 정도겠지만, 또 누군가에게 아몬드 꽃은 삶을 이어가는 자양분일 뿐만 아니라, 긴긴 세월을 이어가는 역사의 한 부분일 수도 있다.


다른 꽃들보다 좀 이르게 피어나 봄이 오는 소리를 전파하는 전령사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아몬드 꽃은 11월 경부터 꽃봉오리를 맺기 시작하여  2월 하순에 꽃이 흐드러진다. 흐드러진 꽃은 약 두 주 정도 피어있는 동안 날아드는 벌에 의해 수분을 하게 된다. 특이한 점은 이 꽃은 다른 종자와 수분을 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벌의 역할은 거의 절대적이다. 벌이 없다면 스스로 수분을 못하는 아몬드 꽃은 더 이상은 아몬드를 맺지 못하고, 번식 또한 불가능해진다.




수분이 된 꽃은 제 할 일을 다 했으므로 떨어져 대지의 꽃이 된다. 작은 꽃잎들이 모이고 모여 대지를 물들일 즈음 아몬드는 드디어 내일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꽃이 없듯이 한 생명이 다른 생명을 낳고, 한 시대가 가면 또 새로운 시대가 오는 것은 그러므로 자연의 이치가 아니던가!





나도 꽃이다.

볼수록 예쁘다.

들여다보면 더 예쁘다.




대부분 농장들이 아몬드 농사를 짓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농가가 아몬드 농사만 짓는 것은 아니다. 이 쪽으로 문외한인 내게 꽃을 보고 무슨 열매를 맺는 나무인지 알아맞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몬드 농장과는 달리 이랑들 사이로 난 고랑들에는 갖은 풀이 자라고 있고, 삐죽이 민들레가 자라 홀씨를 맺은 모습이 이채롭다. 아마도 지난 이삼일 동안 내린 비가 이들을 일깨웠을 것이다.  




이맘때쯤 피는 꽃에는 사과꽃, 배꽃, 살구꽃, 복숭아꽃 따위가 있으므로 아마도 이들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런데 고랑에 난 풀들 사이사이로 민들레만 있는 것은 아니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갖가지 빛깔의 꽃들이 여기저기 섞여있다. 그럴 것이다. 본래 그런 것이다. 사람 손이 가지 않는 곳에는 늘 갖가지 가지가지 생명들이 저들의 리듬에 따라 나서 자라기 마련이다.


넓은 지역이다 보니 무엇을 심어도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아몬드 꽃은 수분된 꽃들이 일제히 떨어져 바닥을 수놓지만, 다른 꽃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모두 자신들의 길에 따라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을 보고 있자니 이제는 봄이 완연하다.




프레즈노와 베이커스 필드의 가운데쯤에 픽슬리(Pixley)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물론 이 마을도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주를 이루는데, 이 마을에서 10여 마일 떨어진 곳에 국립 야생동물 보호구역(National Wildlife Refuge)이 있다. 약 6천9백 에이커(약 2천8백만 평방미터)의 방대한 습지가 조성되어 있고, 여기에 각종 수생식물과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겨울철에는 캐나다 두루미(Sandhill Crane)의 도래지로 이름나 있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곳에는 드넓은 밀밭이 있는데, 가축 사료용으로 재배되는 것 같다.




야생동물 보호구역 안으로 들어가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지난해 말에 갔을 때만 해도 물이 가득하고 갖은 종류의 새들로 북새통을 이뤘던 보호구역이 이렇게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말라버렸기 때문이다. 물은커녕 바닥이 드러나 거북등처럼 말라 갈라져 있었다. 혹시 다른 일 때문에 일부러 물을 빼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보호구역 어디에도 그런 안내문은 없었고 홈페이지에도 상황을 설명하는 어떤 글도 없었다. 그동안의 가뭄으로 마른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할 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올봄에 찾은 보호구역의 모습
지난 해 11월 찾았을 때의 모습이다.




물이 없어 찾아든 새는 없었지만, 다른 식물들은 여전히 자신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삭막했던 겨울의 빛깔을 벗고 푸르스름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여기저기서 다음 세대를 위해 활발하게 생명활동을 하고 있었다. 많은 종류는 아니지만, 몇 가지 꽃이 피고 있었고, 아직 좀 이르지만 끊임없이 다른 빛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물이 없어 물가에 살던 새들은 떠나고 없지만, 이곳에 터 잡고 살던 새들은 여전하게 먹이를 찾아 부지런히 움직이다 잠시 쉬기도 하고, 영롱한 노래로 유혹의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언제 다시 물이 고여 물새들이 찾아들지 기약은 없지만, 속히 그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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