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th Coast Botanic Garden: Spring
모처럼, 참말로 모처럼 비가 왔다.
캘리포니아는 가뭄지역으로 지정되면서 물을 쓰는 데 많은 주의를 기울이다 지난해 들어서면서 눈이 꽤 많아 가뭄지역에서 벗어났었다. 그런데 또다시 가뭄지역으로 지정될 만큼 비가 적고 눈도 적었다. 이제는 아주 가뭄지역으로 못밖아버린다니, 그러지 않아도 이런저런 까닭으로 팍팍하던 생활이 더 팍팍해지게 생겼다. 그러던 참에 내린 비님이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다! 멀리 엘에이 뒷산인 엔젤레스 국유림엔 눈도 쌓였다. 비가 그치자마자 마을 가까이에 있는 수목원을 찾았다.
정원에 들어서면 짙푸른 잔디밭 저 건너편에서 나팔꽃 나무가 반갑게 맞아준다. 이곳에서 가끔씩 결혼식 등의 잔치가 열리기도 한다. 하얗게 보이는 구조물이 단상이다. 지난가을에 왔을 땐 나팔꽃 나무가 잎만 무성했는데, 이젠 확실히 봄인가 보다.
뭐니 뭐니 해도 캘리포니아의 봄은 캘리포니아 양귀비가 펴야 확실해진다. 여기는 사람이 가꾸는 곳이니 물관리를 잘 해줘서 좀 이른 때에 폈지만, 들에서 자라는 양귀비는 아무래도 흐드러지게 피려면 삼월 중하순쯤 가야 한다. 지난해 양귀비 군락지엔 참 많이도 폈었는데 비가 적은 올 해엔 어떨지 자못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도 된다. 이제 구름이 걷힌 뒤라 꽃은 아직 촉촉해서 더욱 싱그럽다.
삼월 초순이니 꽃구경은 아직 이르려나? 그런데도 많이 폈다. 여기 남해안 수목원(South Coastal Botanic Garden)은 철철이 피는 꽃이 골고루 자라고 있다. 이곳은 언제 와도 늘 꽃이 있다. 날이 따스하기 때문에, 하다못해 겨울에 와도 꽃을 볼 수 있다. 하나하나 이름은 다 몰라도 꽃이 종류별로 꽤 많이 폈다. 메밀꽃(California Buckwheat)도 피고 라일락(Lilac Verbena)도 한창이다.
앙증맞고 귀여운 이 풀의 정체는 남아프리카에서 날아온 단추 꽃(Bachelor's Buttons)이다. 학명은 코툴라 투르비나타(Kotula turbinata)라고 하고, 매년 겨울에서 봄 사이에 꽃을 피우는 한 해살이 식물이다. 씨앗으로 번식을 하며 주로 잔디밭 등에서 잘 자란다. 주변의 풀들과 빛깔이 잘 어울리면서도 불쑥 솓은 꽃대 때문에 숨어 있기는 어려운 꽃이다. 볼수록 예쁘다. 노란 빛깔은 어찌 보면 수수하면서도 다른 빛이 섞이지 않고 밝아서 오히려 화려하기까지 하다.
남해안 수목원은 주변의 다른 수목원들에 비해서 규모는 좀 아담한(?) 87 에이커 정도지만, 커다란 수목원들에 못지않게 매우 다양한 식물들을 가꾸고 있다. 그러나 이곳만의 특별한 식물이 있는 것은 아니다. 동백꽃으로 이름나 있든지, 대나무로 이름나 있든지, 아니면 일본식 정원으로 이름나 있는 등 대체로 수목원들은 그들 나름대로 뚜렷해 보이는 식물이나 구조를 가지고 있기 마련인데, 이곳은 그런 것은 없다. 그러나 다양한 식물들을 가꾸고 있어서 어느 계절에 찾아도 늘 꽃을 볼 수 있으며, 종류별로 구역을 정해 관리하고 있어서 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즐겨 찾고 있다.
무엇보다 이곳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쓰레기 매립장 위에 만들어진 수목원이라는 점이 남다르다. 오래전에 이곳은 광산이 있었던 곳인데, 시에서 매입하여 쓰레기 매립장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후 이곳은 시 주도로 수목원으로 재개발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때가 1960년 대이니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사례였다고 한다. 사람이 배출하는 쓰레기와 그 처리, 그리고 사후 관리에 이르기까지 좋은 선례를 남기는 토지이용 방법이었다. 아마 서울의 난지도 공원도 이에 못지않은 사례로 기록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놀랍게도 난지도가 쓰레기 매립지로 되기 전까지는 경관이 훌륭해서 신혼여행지로 각광받았다는 사실은 이번에야 알게 되었다. 당시 서울의 쓰레기 배출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비가 갠 하늘은 맑고 깨끗해서 시리도록 푸르다. 구름 한 점 없는 부분을 배경으로 서 있는 이 나무는 풀솜 나무(Floss Silk Tree)인데, 학명은 Ceiba speciosa다. 열매처럼 매달린 저 부분이 여물면 껍데기가 터지면서 안에 있는 솜과 씨앗이 드러난다. 이 나무 주변에는 여기서 나온 솜 때문에 마치 눈이 온 것처럼 하얗게 쌓일 때도 있다. 그 옆에 있는 노란 꽃이 핀 나무는 노랑 나팔꽃 나무(Golden Trumpet Tree)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식물원에는 나팔꽃 나무가 여러 종류가 자라고 있다. 위에 보이는 맨 왼쪽 사진의 가운데에 서있는 나무도 붉은 나팔꽃 나무다.
수목원이 아담하다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3십5만 2천 평방미터에 이르는 꽤 넓은 면적이다. 아담한 것은 지난번 소개한 '데스칸소 가든'이 165 에이커(6십7만 평방미터) 정도의 규모다 보니 비교적 아담하다고 표현했다. 사실 이곳 남해안 수목원을 제대로 둘러보려면 하루로도 모자를 만큼 넓다. 오늘 소개하는 지역은 주로 꽃이 핀 지역을 위주로 소개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머지 지역은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추가로 소개하도록 하겠다.
공원을 산책하다 보면 다양한 새들도 볼 수 있는데, 참새로 보이는 이 새는 지저귀는 소리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한참을 서서 귀를 기울였다. 참새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면 참새는 아닌 것 같은 이 새는 이곳에서 한동안 노래를 하길래 뒤로 돌아가 섹시한 뒤태도 담을 수 있었다.
공원은 구석구석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관리가 잘 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곳에서 자라는 모든 종류의 식물들이 다 일부러 씨를 뿌리고 가꾸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 그렇게는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자연은 늘 자유롭다. 사람의 힘으로 억누르고 조절해서 사람이 좋아하고 원하는 대로 키우려고 해도 그렇게는 하기 어려운 것이 자연이기도 하다. 개중에는 끊임없는 제한과 억제와 조절로 그렇게 만들어 내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바로 분재가 그것인데, 개인적으로 이런 방식을 굉장히 싫어한다. 같은 이유로 미국 땅에 만연한 잔디밭도 그리 달갑지는 않다.
때로는 사람이 씨를 뿌리고 가꾸고 싶어 하는 풀이나 꽃나무들 보다 스스로 움을 틔워 꽃을 피우는 풀이 더 아름답기도 하다. 이들이 자랄 수 있는 조건이 잘 갖추어진 곳에서라면 그들은 더욱 활발하게 자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공원이기 때문에 이런 식물들이 널리 퍼지는 것을 그냥 놔둘리야 만무하지만, 어쨌든 그래도 그들은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다. 그들의 멈추지 않는 생명활동과 어떤 힘에도 굴하지 않는 꿋꿋함이 좋다. 어떤 이들은 그런 풀들을 일컬어 잡초라고 부르면서 없애려고만 하는데, 따지고 보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사람들에게도 결코 좋지만은 않다. 좀 크게 본다면 지구라는 별은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이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생명체라고 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쪽에 제한을 가하면 저쪽이 트이고, 저쪽을 막으면 이쪽으로 흐르는 것이 자연의 일 아니겠는가! 그런데 막고 뚫어 사람이 어찌해 보려고 한 곳은 끝내는 곪아 터지기 마련이다.
아, 그렇다! 실은 오늘 여기에서 벚꽃 축제가 있다고 해서 들른 것이다. 정기 입장권을 끊어놓고 시간 될 때마다 와서 한 바퀴씩 돌고는 하는데, 오늘은 특별히 벚꽃 축제를 볼 심산으로 들렀다. 고국에서 본 후로는 벚꽃 구경을 못했던 터라 반가웠다. 그런데 공원을 한 바퀴 도는 동안 벚나무를 찾을 수 없어 의아했다. 벚꽃 축제라고 하면 아무래도 벚나무 터널이나 수많은 벚나무 길을 걸으며 꽃비를 맞는 장면을 기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둘러봐도 벚나무는 찾을 수가 없으니 어찌 된 영문일까?
그렇게 한동안 영문을 모른 채 둘러보던 차에 드디어 한 그루 찾았다! 자그마한 나무는 기껏해야 두세 살쯤 돼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사진 몇 장 찍고 더 없을까 둘러보지만, 그뿐이었다. '이것뿐일까? 아니겠지!' 혼자 중얼거리며 좀 더 가다 보니 저 앞에 한 그루 더 보인다. 그리고 그 후로 서너 그루 더 보았을 뿐 더 이상은 없었다. 그나마 그 몇 그루 안 되는 나무들이 각기 다른 종류였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공원을 들어올 때, 입구에는 축제를 위해 푸드 트럭 몇 대와 푸트 코트가 마련되어 있고, 각종 선물을 판매하는 가판대가 있어서 축제 분위기를 북돋우고 있어서 부푼 기대를 안고 들어왔는데, 그저 헛웃음이 나왔다. 공원이 벚꽃 축제라고 한 표현은 벚꽃이 피는 때에 하는 축제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을 해보니, 척박한 캘리포니아에서 너무 큰 기대를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저 꽃이 있고 제때에 꽃이 폈다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한 일 아닌가.
이 우람하고 풍성한 나무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정도면 꽃냄새가 진동을 할 텐데 냄새도 없이 꽃만 무성하다. 궁금해서 나무의 가슴팍에 붙어있는 이름표를 확인해 보았다. 케이프 밤나무(Cape Chestnut), 학명은 Calodendrum capense다. 남아프리카가 원산지인 이 밤나무는 주로 아프리카와 유럽 지역에서 자란다. 밤과 마찬가지로 가을에 열매가 맺으며 가시가 없는 겉껍질 속에 네댓 개의 알밤이 들어있다. 크기는 밤보다 작고 도토리보다 크며, 주로 기름을 짜는 데 이용된다. 이 밤에서 짠 기름을 특별히 Yangu Oil이라고 해서 주로 천연 미용 재료로 활용한다고 한다. 이 정도 나무 몇 그루만 더 있으면 그야말로 꽃길이 될 텐데... 벚꽃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드는가 보다.
공원의 전면부에 있는 잔디밭을 지나면 바로 나타나는 이곳은 최근에 다시 조성된 장미정원이다. 콘크리트와 시멘트 등을 이용해서 깔끔해 보이기는 해도 아직은 왠지 정이 가질 않는 곳이다. 기존의 정원들이 그저 흙을 다져 길을 내는 등 자연 상태를 유지하려고 했다면, 이곳은 최대한 인공미를 내려고 한 것 같아 보인다. 아마 장미 넝쿨이 아직 제대로 자라지 않아 그런 느낌이 더 클지는 모르겠다. 마침 이 장미 정원이 재정비되기 전에 찍어놓은 사진이 있어 함께 소개한다.
이렇게 한 바퀴 돌고 나니 이제는 틀림없는 봄이 왔다. 진정한 봄은 날씨뿐만 아니라 마음도 따뜻해질 때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렇게 꽃들과 어울리고, 싱그러운 자연을 벗 삼아 시간을 보내고 나니 마음이 한결 따뜻해졌다. 오늘 꽃들에게 받은 즐겁고 행복한 이 기운이 아직은 많이 차가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