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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미 Dec 06. 2022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출근길 버스에서 졸다가 눈이 번쩍 띄었어. 좌회전해야 하는 삼거리에서 버스가 우회전을 해버리는 거야. 급하게 내려 버스정류장의 전광판을 살펴보니 내가 타고 있던 버스번호와 독일어 안내문이 지나가고 있었어.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전광판에 예정된 버스가 뜨지 않는 걸로 보아 버스노선에 변동이 생긴 것 같았어. 결국 나는 트램으로 갈아타고 평소보다 조금 늦게 회사에 도착했어.


여전히 이곳, 취리히의 많은 것이 낯설지만, 그래도 출근길은 완전히 익숙해졌어. 익숙해지고 난 후론 그냥 자동재생이야. 어디로 가는지 어디에서 갈아타야 하는지 아무 생각하지 않고 있어도, 환승역에서 내리고, 버스를 갈아타고, 어느새 회사 앞에 도착해있곤 해.


오늘도 별다를 것 없이 조금 멍한 채로 버스에 올랐어. 이어폰에선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나는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반쯤 졸고 있었어. 뭔가 잘못됐음을 깨닫고 버스에서 내리고 나서야 내가 회사를 가는 중이었고, 절반 정도 와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됐어.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오늘 버스에서 내려 제일 처음 했던 생각이었어. 그리고 익숙했던 서울을 떠나 이곳에 온 후 자주 하게 되는 생각이기도 해. 이곳에 오는 건 내가 선택한 일이었지만, 그다지 깊게 고민해서 내린 결정은 아니었어. 그래서 가끔은 여기에 온 게 그냥 사고같이 느껴지기도 해. 그런데 그게 정말 사고였어도 별 상관없다는 생각을 오늘 하게 됐어. 갑작스러운 사고는 내가 어디로 가려던 거였는지, 지금껏 얼마나 왔는지 떠올리게 해 주었어. 목적지를 떠올리고, 내가 정말 그곳에 가고 싶은지 고민하고, 어디까지 왔는지 생각하게 해 주었으니, 이곳에 오게 된 게 그저 사고일 뿐이여도, 그래서 결국 같은 목적지로 향하게 된다 하더라도, 의미 없는 일은 아닐 거야.


2022.12.5. 여기 취리히에서 유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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