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잎을 선물해줬던 너에게
지금 한국은 완연한 가을이라고 들었어. 단풍도 지기 시작했으려나? 노란 은행잎으로 물든 거리가 좀 그리운 것 같아. 은행 냄새도 그립다고 하면 너무 감상에 취한 걸까? 취리히에도 가을이 오긴 왔는데 글쎄. 단풍이라 할만한 걸 본거 같진 않아.
단풍은 없지만 가을이 왔구나 실감했을 때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였어. 오늘 조금 늦게 일어났는데도 창밖이 어둑어둑하더라고. 여름엔 새벽 다섯 시 반만 돼도 밖이 환해서 잠에서 깨곤 했었는데 말이야. 해가 워낙 길어서 나는 새 집으로 이사하고 두 달 동안 천장에 전등을 다는 것도 잊고 지냈어. (참고로, 취리히 집 천장에는 형광등이 없어! 필요하면 세입자가 직접 설치해야 해.)
이젠 해가 짧아져서 정말 천장 조명을 사야 할 것 같아. 지난 주말에 빈티지샵에 다녀온 것도 그래서였어. 인터넷에 파는 조명들 중엔 맘에 드는 게 없어서 예전에 추천받은 빈티지 샵 생각이 나더라고.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구석진 빈티지샵을 상상하고 갔는데, 세상에, 빈티지샵이 사층짜리 건물 전체인 거 있지.
나는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엘리스처럼 정신없이 헤매고 다녔어. 찻잔을 몇 번 들었다 놨다 했고, 샹들리에의 가격표를 확인하기도 했고, 조약돌 더미에서 예쁜 돌을 골라보기도 했는데, 결국 빈손으로 나오고 말았어. 물건도 많고 사람도 많아서 뭘 사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그나저나 빈티지는 어떤 매력이 있길래 사층짜리 건물 전체가 빈티지샵 일 수 있는 걸까? 내 생각에는 어쩐지 가을 같은 매력이 있는 것 같아. 우리 집에도 빈티지 접시가 하나 있잖아. 네가 재작년 내 생일에 선물해 준 거 말이야. 네가 사준 빈티지 접시는 은은하게 색이 바래 있는 게 노란 은행잎을 떠올리게 해. 은행잎이 노랗게 되기까지 봄과 여름을 거쳐왔듯 저 접시도 내가 모르는 긴 시간을 거쳐 지금의 빛이 되었겠지?
다음 한국에 가기 전에 또 빈티지샵에 들려볼까 해. 천천히 둘러보면서 네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골라 볼 거야. 네 신혼집에 잘 어울릴 화사한 꽃병이 있으면 좋겠다.
2022.9.26 전자레인지에 구운 은행이 먹고 싶은 유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