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리히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새삥을 추는 사람들
BBC였던 너에게
취리히에선 일요일에 할 게 없어. 문 여는 가게가 없거든. 일요일에 친구를 만나면 돈 없던 대학생 때처럼 공원을 하염없이 산책하다 집에 오게돼. 오늘도 평범한 일요일 있어. 친구와 브런치를 먹고 여느 때처럼 또 산책을 했어.
호숫가를 따라 걸어내려 가는데 오페라 하우스 앞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어. 한참 걷다가 다시 올라왔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어. 호기심이 생겨서 가까이 가보니, 익숙한 비트가 들렸어. 효연의 Deep 이였어.
스피커에선 랜덤으로 케이팝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안무를 아는 사람들은 광장 가운데에서 각자 춤을 췄어. 에이티즈 슬로건을 들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비비지 응원봉을 든 사람도 있었어. 스피커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는데 딱 한곡은 듣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어. 틱톡에서 유행했던 지코의 새삥이었어. 새삥이 나오자마자 사람들이 우르르 가운데로 모여들었어. 잘 추든 못 추든 신나게 춤을 추더라. 나는 약간 얼떨떨했어. 홍대도 아니고, 스위스 취리히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새삥을 추고 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니?
지난번에 우버를 탔을 때,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기사님이 자꾸 일본 얘기를 하셨어. 기분이 나쁘진 않았는데, 사케와 스시 얘기가 딱히 재밌지는 않았어. 하지만 오늘 본 그 케이팝 팬들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아마 케이팝 얘기를 하게 되겠지? 나도 인생이 케이팝인 사람이라 신나게 이야기할 것 같아. 참 고마운 일이야. 아이돌들이 열심히 춤추고 노래해준 덕에, 나는 만리타향에서 조금 덜 외로울 수 있게 됐어.
2022.11.6. 내 가수 노래도 더 유명해졌으면 좋겠는 유미가.
P.S. 너 예전에 BBC 였지 않아? 오빠한테 고맙다고 전해줘. 안되면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