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신보다 모의고사 성적이 좋았어. 그래서 소위 말하는 정시 파이터가 되었어. 그러다 수능 당일에 알게 되었어. 나는 모의고사를 잘 봐온 게 아니고, 부담이 되는 시험을 잘 못 봐 왔던 거였어.
그 해는 유독 수리영역이 어려웠어. 문제를 풀다 팔과 다리에 쥐가 났어. 겨우 수리영역을 마치고 친구와 같이 점심 도시락을 먹는데 친구가 먼저 울기 시작했어. 내 도시락 위에도 눈물이 뚝뚝 떨어졌어.
시험 결과는 역시 좋지 않았고 나는 재수를 하게 됐어. 재수할 땐 수시 준비도 같이 했던 터라 두 번째 수능은 부담이 조금 덜 했어. 그래서인지 나쁘지 않은 점수를 받게 되었고, 논술 고사도 잘 봐서 맘에 드는 대학에 가게 되었어.
문제는 전공이었어. 여러 논술고사들의 일정을 맞추며 급히 원서를 썼더니, 생각도 해본 적 없던 컴퓨터공학과에 가게 되었어.
결말은 뜬금없는 해피엔딩이야. 대학생활은 즐거웠어. 너랑 민주랑 붙어 다니면서 공부도, 놀기도 열심히 했지. 다정하고 잘생긴 같은 과 남자 친구를 만나 오 년 동안 캠퍼스 커플도 했고, 공부도 생각보다 적성에 맞아서 졸업할 땐 자랑할 것도 많았어. 그땐 몰랐지만, 드라마 같은 시절이었어.
가끔 내가 첫 수능을 잘 봤으면 어떻게 됐을까 떠올려보곤 해. 물론 그랬어도 잘 살았겠지만, 내 인생에 너도, 민주도, 첫사랑도, 지금의 직업도 없었을 거야.
“잘못탄 기차가 목적지에 데려다준다.”는 강연을 들었어. 나도 기차를 여러 번 잘못 탔었어. 하지만 잘못 본 수능과 잘못 간 학과는 결과적으로 나를 목적지에 데려다줬어. 인생은 단 한번뿐이니 다른 목적지와 비교해 볼 순 없지만, 아무튼 나는 내가 도착한 이곳이 맘에 들어. 쏟아지는 눈물을 훔치느라 수능고사장 출구도 찾지 못하던 열아홉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이번에 잘못탄 기차가 결국 너를 목적지에 데려다준단다’’ 하고 귀띔해주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