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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문환 May 15. 2017

케냐, 너는 누구. 나는 어디.

보통 사람의 아프리카 여행법 - Nairobi, Kenya

 

 3주 전 고작 하룻밤을 보낸 공항 치고는 포근하다. 경험치가 쌓인 만큼 요령도 생겼다. 내리자마자 속보로 걸어 비자 신청서를 후딱 작성하고 입국심사대 앞에 줄을 섰다. 사람들은 그제야 비자 신청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기다리다가 내 차례가 되었을 때쯤, 이런! 신청서 뒷면을 빼먹었다. 다시 줄 밖으로 나와서 뒷면을 채우고 나니 아까보다 줄이 훨씬 길어져 있다.



 지난번과 같은 입국심사관이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내 여권을 보더니 ‘오~꼬레아~’하며 눈썹을 씰룩거리며 도장을 쾅 찍어준다. 그리고는 길게 늘어진 줄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흥얼거리며 여권을 건넨다. 차갑고 딱딱한, 어쩔 땐 위압적이기까지 해서 준비한 대답조차 어버버 거리게 만드는 미국이나 영국의 입국심사 분위기를 생각하면 이래도 되나 싶기까지 하다.




 캐리어 대신 배낭을 메고 하는 여행의 장점 중 하나는 짐이 빨리 나온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컨베이어 벨트에 도착하자마자 내 배낭에 눈에 바로 들어왔다. 아까 내 앞에 줄을 섰던 사람들 사이로 (이번엔 정말로) 의기양양하게 배낭을 들쳐 메고 밖으로 나왔다. 바로 들른 곳은 케냐의 대표 이동통신사 사파리콤. 아디스아바바에 도착한 첫날처럼 이번에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유심칩을 사는 일이다. 통화 얼마, 데이터 얼마 해서 1,000실링을 냈다. 그러면서 내 폰에 유심칩을 끼워주고 있는 직원에게 슬쩍 물어봤다.


“여기로 가려는데 택시비가 어느 정도 나올까?”


 직원은 별 관심 없다는 듯 옆에 서 있던 키가 큰 남자에게 대신 대답하라는 눈짓을 보낸다. 그가 대신 대답했다.


“2,000실링.”

“음. 그러면 네가 좀 믿을 만한 택시기사 한 명 소개시켜 줄 수 있을까?”

“나 택시기사야. 내 택시를 타고 가자.”


 뭐야, 결국 택시기사에게 택시비를 물어본 꼴이 됐잖아? 그래도 이 남자가 밖에 있는 껄렁한 택시기사들보다는 믿음직해 보인다. 이제 승부수를 띄워야 할 순간.


“좋아. 네 차를 탈게. 대신 1,500실링으로 하자.”

“안돼. 1,900실링.”


그렇게 몇 번의 협상 끝에 1,700실링으로 가격을 정하고 그의 택시

에 올랐다.


‘와, 에티오피아에서 타던 문짝이 열리는 택시들과는 급이 다르잖아.’


그의 택시는 크고 깨끗한 6인승 미니벤이었다. 마치 방금 광택 세차를 한 것처럼 번쩍이는 외관에 스틱이 아닌 오토매틱을 갖춘. 내가 감탄하고 있는 사이에 차는 빠르게 공항을 빠져나왔다.


‘여기가 내가 생각했던 아프리카가 맞나?’


 나이로비는 아디스아바바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발전된 도시였다. 국내 대기업을 포함한 글로벌 회사의 대형 간판이 수시로 눈에 띄었다. 도로는 잘 닦여 있었고 차들은 차선을 준수하여 달리고 있었으며 (심지어) 신호등도 있었다! 바로 옆 나라 에티오피아와 달라도 이렇게 다르다니. 과장을 좀 보태면 출발 후 첫 5분은 정말 미국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고급택시라도 낯선이와 단 둘이 차에 있으니 긴장이 됐다. 대로변을 벗어나 도시의 불빛이 사라질 때쯤엔 괜히 친한 척 말을 많이 걸기도 했다. 행여나 내 짐을 뺏고 나를 차에서 내동댕이치려던 그가 마음을 바꿀 수 있게. 그가 갓 태어난 딸의 사진을 보여줬을 때 비로소 간장감이 녹으며 좌석에 등을 기댈 수 있었다.


 진무 형이 소개시켜 준 NGO 직원분들이 늦은 시각에도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이곳은 마당이 있는 2층짜리 주택인데 1층은 NGO 사무실이고 2층은 게스트룸이다. 나는 여기서 3박을 하며 신세를 지게 됐다. 두 분은 내가 저녁을 못 먹었을까 봐 반찬을 꺼내 놓으셨고 행여나 묵은 빨래가 있을까 봐 탈수기 사용법을 알려주셨다. 초면에 황송한 대접을 넙죽넙죽 받아가며 2층까지 올라왔다. 게스트룸은 침대 두 개가 딸랑 있는 텅 빈 방이었는데 빨랫줄도 있고 무엇보다 널찍해서 아주 좋았다. 피곤했지만 양말과 속옷을 대충 빨아 빨랫줄에 걸었다. 그리고는 씻지도 않고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큰 한숨과 함께 하루의 피로가 몰려온다. 그렇게 눈을 감고 몇 분이나 지났을까. 이불의 보풀을 만지작 거리다가 문득 여기가 어디인가 싶어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몰랐던 곳에 내가 있다. 또 지금은 언제인가. 낯선 공간, 낯선 시간 속의 나를 발견한다. 누군가 나를 쏙 집어다가 지금 이 곳에 툭 던져놓은 것만 같다. 정신이 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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