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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문환 May 22. 2017

여행자의 덕목, 임기응변

보통 사람의 아프리카 여행법 - Nairobi, Kenya

 

 장기간의 여행을 계획하다 보면 대륙별로 하이라이트가 될만한 굵직한 볼거리를 기대하게 마련이다. 내 일정에선 남미의 이과수 폭포, 우유니 소금사막, 마추픽추 그리고 북유럽의 오로라와 피오르드 정도가 있겠다. 여기 아프리카에는 사파리가 있다. 야생동물이라곤 지하주차장에 사는 고양이나 기차역 앞 광장의 비둘기 정도뿐인 서울에서 평생을 살아온 나는 사자가 사냥을 하고 물소가 강을 건너는 장면을 볼 생각을 하니 며칠 전부터 잔뜩 들떠 있었다. 케냐의 마사이마라와 탄자니아의 세렝게티를 두고 고민했는데(사실 두 국립공원은 연결되어 있고 국경으로 나뉘어 각각의 이름으로 불린다), 대이동 시기인 지금 많은 동물이 북쪽으로 넘어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마사이마라로 결정했다. 보통 마사이마라에 나쿠루 국립공원을 끼워서 3박 4일로 많이들 가는데 올해는 비가 많이 와서 나쿠루 국립공원에 홍학이 거의 없다고 했다(10마리 정도 있다고 했다). 나는 ‘마사이마라 2박 3일 투어’로 정하고 거금을 여행사에 지불했다.


며칠간의 나의 보금자리


 마사이마라로 가기 전날 숙소에만 있을 수 없어 어디라도 가봐야겠다는 생각에 직원분들이 부른 택시에 냉큼 올라탔다. 택시기사는 단지를 빠져나와 2차선 도로로 차를 몰았고 그러는 사이에 빨간 아침 햇살이 유리창을 뚫고 차 안으로 들어왔다. 무릎 위에 엎어놨던 손바닥을 뒤집었다. 햇살은 손등에 닿을 때보다 더 따뜻했다. 창밖엔 에티오피아에서는 우기라 볼 수 없었던 푸른 하늘과 우거진 초록색 풀잎들, 더 까만 피부의 사람들이 지나간다. 나이로비는 내가 생각했던 아프리카와 더 닮았구나. 기대했던 아프리카의 느낌을 케냐에 온 첫날부터 느껴서일까. 빌리지 마켓까지 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마음은 기대와 설렘으로 충만해졌다.


 나이로비(Nairobi)는 나이로버리(Nairobbery)라고 불릴 정도로 치안이 불안하다. 무슨 도시 이름을 저렇게 바꿔 놔서 괜히 겁을 주고 그러냐, 콧방귀를 뀌면서도 겁이 나긴 했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나이로비 시내를 활보했다간 백 미터 안에 무조건 털리고야 만다더라, 길가다가 그냥 다짜고짜 칼침은 맞은 관광객도 있다더라, 하는 카더라 괴담은 도시 이름만으로는 설마 하던 나를 더욱 자극했다. 나이로비에 거주하는 사람을 포함한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쇼핑몰 안에서 밥도 먹고 쇼핑도 하는 걸 보니 소문이 마냥 거짓은 아닌 듯하다. 내가 가는 빌리지 마켓도 그 쇼핑몰 중 하나. 택시는 쇼핑몰 입구에 있는 보안검색대 앞에 멈춰 섰다. 귀찮았지만 보안검색대를 통과하고 나니 안심이 되긴 했다. 적어도 총을 핸드백에 넣고 다니는 아주머니는 없을 테니까.



아, 이곳이 정녕 아프리카란 말인가.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벽돌 색깔 기와지붕과 맨들맨들한 타일 바닥, 통유리로 된 가게들. 고작 검색대 하나 통과했을 뿐인데 이곳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 주위의 모든 것이 주는 안도감에 용기를 얻어 아프리카에 온 이후 처음으로 카메라를 한쪽 어깨에 걸었다. 그리고 이곳저곳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관리인이 갑자기 다가와서는 여기는 사진이 허용된 장소가 아니니 관리실에 가서 무슨 허가를 받아오라면서 지금까지 찍은 사진을 다 지우란다. 허, 참. 

 ‘Management Office’라는 곳의 문을 두드리고 고개를 빼꼼 내밀어봤다. 히잡을 둘러쓴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사진을 찍으려면 이곳에서 허가를 받으라길래….”


쭈뼛거리는 나의 말을 단호하게 끊으며 그녀가 말했다.


“여기서 찍은 사진을 상업적으로 쓰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허가해 주지.”

“(여기서 찍은걸 누가 산다고…) 알겠어. 약속할게.”

“좋아. 그래도 다른 사람들의 사진을 찍으면 안 돼. 너와 네 일행들 사진만 찍어야 해.”


무슨 허가증이라도 주는 줄 알았는데 그냥 그게 끝이었다. 구두라도 일단 허가를 받으니 마음은 편해졌다. 이젠 아예 카메라를 한 손에 쥐고 어슬렁거리며 아까 지운 사진을 다시 찍었다. 허가받고 왔다고 말하길 벼르고 있는데 어쩐지 그 관리인은 이번엔 날 보고도 모른 체 한다. 아깐 그냥 날 보고 한마디 하고 싶었던 걸까.



 와이파이가 제일 빠르다는 ‘아트카페’로 들어갔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켰는데 가격이 에티오피아의 몇 배는 됐다. 이 가격이면 거의 한국 카페 수준이다. 툴툴거리며 품에 꼭 안고 가져온 노트북을 꺼내 무선 인터넷 신호를 잡았다. 드디어 블로그에 뭐라도 올릴 수 있겠구나. 여행을 떠나기 전, 블로그를 개설하고 여행자 명함에 주소까지 써놨는데 막상 여행을 떠나고 나니 블로그를 할 시간도 환경도 받쳐주지 못했다. 그래도 사진 몇 장에 글자 몇 개라도 올려야 하지 않겠나 하는, 미뤄놓은 숙제를 하는 마음으로 카페를 찾은 터였다. 올릴만한 사진을

고르고 서명을 넣고 그 밑에 글을 쓰는 작업을 반복했다. 인터넷도 생각보다 빠르지 않은 데다 사진 용량이 워낙 커서 사진 한 장을 올리는데도 한참이 걸린다. 같은 자리에 6시간 동안 앉아 음식을 두 번이나 시켜가며 노트북을 두드린 결과 글 하나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 성취 감, 후련함, 해방감. 비록 에티오피아의 첫 3일 일정밖에 담지 못했지만 난 만족했다(난 이 이후로 여행하는 내내 블로그에 글씨 하나 적지 않았다).


 

 전화로 부른 택시가 올 때까지 빌리지 마켓을 좀 돌아보기로 했다. 기념품 가게도 가보고 케냐 대표 전자제품 체인점에 가서 어댑터도 찾아봤다. 돌아다니며 사진을 몇 장 찍었는데 누가 나를 뒤에서 툭툭 친다.


“이봐, 여기서 사진 찍지 말라는 말 못 들었어?”

“나 아까 Management Office에서 허락받았는데.”

“허락받아도 아무거나 찍으면 안 돼. 너랑 너의 일행들의 모습만 촬영 가능하다구.”


 다른 사람 찍는 것도 아니고 그냥 쇼핑몰 내부의 모습이나 조형물을 찍는데 도대체 왜? 이해는 안 갔지만 규정이라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순간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우선 그의 환심을 사기로.


“진짜? 몰랐어. 미안해. 조심할게. 나 한국에서 온 관광객인데 어제 도착해서 오늘이 이틀째야. 근데 나이로비 정말 좋은 거 같아. 내가 에티오피아에 한 3주 있었거든. 거기는 차선도 없고 신호등도 없는데 여긴 길도 잘 닦여 있고 진짜 발전된 나라 같아.”


 최대한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동양에서 온 관광객 입에서 나온 자국에 대한 칭찬에 그의 얼굴빛이 변했다. 


“한국에서 왔구나. North? South?”

“South.”

“오. 그렇구나. 그런데 왜 한국은 남북으로 갈라져 있니?”


 이렇게 시작된 그와 나의 대화. 나이로비의 쇼핑몰 관리인에게 한국전쟁의 발발 이유에 대해 설명하게 될 줄이야. 이렇게 해서라도 찍은 사진들을 지키고 말리라. 그렇게 미국과 소련이 어쩌고 저쩌고 김일성이 어쩌고 저쩌고 38선이 어쩌고 저쩌고. 그렇게 서서 그와 15분 정도 이야기를 했을까. 시종일관 밝은 표정으로 얘를 듣던 그는 대화가 끝날 무렵 사진은 까맣게 잊은 듯 내게 하이파이브를 청했다. 그렇게 우린 멋지게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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