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사람의 아프리카 여행법 - Maasai Mara, Kenya
마사이마라에서의 둘째 날. 텐트 지퍼를 열고 나가니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감싼다. 자연 속에서 아침을 맞을 때만 경험할 수 있는 공기의 냄새가 향수를 일으킨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람단 활동을 시작했다. 요즘도 있나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할머니 손을 붙잡고 남대문에 가서 아람단 의복도 사 입고 아람단 활동을 시작했는데, 처음으로 학교 운동장에서 캠핑을 하던 날 아침 일찍 일어나 텐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맡던 공기의 냄새가 기억난다. 전날 밤 캠프파이어의 잔해와 아직 남아 있는 불씨에서 나는 희미한 탄내. 그게 내가 가지고 있는 아침 공기에 대한 기억의 시작이다.
슬리퍼를 끌고 식당에 갔다. 일찍 일어난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 커피를 마시고 있다. 나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잠도 마저 깨고 사람들 따라 어영부영 줄도 서서 아침도 먹었다. 다시 시작된 게임 드라이브. 차 천장이 뚫려 있으니 아침엔 꽤 춥다. 눈을 감고 얼굴로 바람을 맞았다. 내가 진짜 여행을 하고 있구나. 아프리카에서.
공원 입구를 통과한 지 20분도 안 됐을 때 차에 문제가 생겼다. 찰스는 다시 공원 밖으로 나가 수리점에서 차를 고쳐야 한다고 했다. 다들 ‘No Problem’. 아프리카에 와서 그런지 다들 여유만만이다. 나도 20년 전 티몬과 품바로부터 배운 하쿠나 마타타 정신을 여기서 써먹어 본다.
오늘은 어제보다 동물들이 훨씬 더 많이 보였다. 누와 얼룩말이 사방에 쫙 펼쳐져 있는 길을 달린다. 어제 사자가 먹다 남긴 누를 먹고 있는 독수리들도 보이고, 배가 부른 지 배를 까고 자고 있는 정글의 왕 사자도 보인다. 타조도 있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커서 깜짝 놀랐다. 2미터도 넘는 거 같다. 한참을 더 달려 강가에 도착했다. 강 아래쪽엔 하마 무리가 여유롭게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저렇게 자다가 일어나 물에 들어가서 몸을 식히고, 또 자고 하나보다. 이렇게 멀리서 보면 귀엽기만 한 하마는(특히 새끼 하마는 색깔도 다르고 다리도 짧은 게 얼마나 귀여운지 모른다) 알고 보면 가장 난폭한 동물 중 하나라고 한다. 여기 마사이마라에선 하마들이 사냥을 하는 모습을 못 봐서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나중에 보츠와나 오카방고 델타에서 하마 두 마리가 싸우는 걸 보고 기겁했다.
어제보다 훨씬 다양한 동물을 더 많이 볼 수 있어 즐거운 오전 게임 드라이브였다. 점심은 강가에서 좀 떨어진 한적한 곳에서 먹었다. 큰 나무 아래 돗자리를 펴고 숙소에서 제공한 점심을 꺼냈다. 호일에 싸인 샌드위치, 치킨 그리고 바나나와 팩에 든 주스. 부실했지만 마사이 마라 안에서 먹는 식사라 그런지 굉장히 맛있게 먹었다.
점심을 먹고 다시 차에 오르기 전 나무에 기대어 이옌, 카이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툭. 팔에 뭔가 닿았다. 뭐지? 이게 뭐야? 검은 고체에 흰색 액체가 팔을 타고 흐른다. 흐익! 새똥이다! 새가 방금 전 싼 따끈한 똥을 직접 맞은 거다. 호들갑을 떨며 물을 부어 새똥을 씻어 내렸다. 사람들은 웃으며 새똥을 맞은 건 행운이라며 오히려 축하를 건넨다. 로버트는 내가 새똥을 맞았기 때문에 이따가 누떼가 강을 건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며 좋아했다. 사람들의 의외의 반응에 처음엔 재수 없게 새똥을 맞았다며 툴툴거리던 나도 어느덧 머리에 안
맞은 게 어디냐며 생각을 고쳐먹기에 이르렀다.
다시 강가로 가니 차들이 엄청나게 몰려있다. 점심시간 전에 봤던 누 떼들이 이제 강을 건너려 하는 모양이다. 엄청나게 긴장됐다. 차들은 누떼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 출발 신호만을 기다리는 레이싱카처럼 수십 대의 사파리 차들이 부릉부릉 소리를 내며 매연을 내뿜는다. 차들이 서로 눈치를 보는 것처럼 누들도 총대를 메고 선두에 서서 강을 건널 대장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갑자기 차들이 동시에 출발하더니 강가로 돌진한다. 오오. 드디어 시작인가. 강 아래쪽으로부터 먼지가 뿌옇게 올라오는 게 아무래도 앞선 몇 마리가 강을 건너기 시작한 모양이다. 찰스는 다른 차들보다 더 좋은 자리를 선점했고 우리는 보았다. 그 고대하던 광경을.
역동적인 날것. 가슴이 벅찼다. 하루 종일 풀만 뜯던 순해 보이는 녀석들이 생존을 위해 악어가 득실거리는 강으로 뛰어드는 모습이란. 내 두 눈으로 이런 광경을 보고 있다는 자체가 믿어지지 않았다. 수백 마리의 누가 약속이나 한 듯이 강을 건너는 모습은 신비로웠다. 아니 아름다웠다. 야생에서 보는 모든 것들이 감동적인 이유는 바로 어떠한 연출과 설정도 없는 자연 그 자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떠한 인간의 개입 없이 오로지 본능에 이끌려 위험을 무릅쓰는 것.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보기 위해 이곳까지 오는 것이다. 나 역시 이 장면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고 또 본 것이다. 대이동 시기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듣고 보니 이걸 보기 위해 일주일 씩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우리가 얼마나 운이 좋은지. 일행들은 이게 다 새똥을 맞은 내 덕이라며 내 게 고맙단 인사를 했다. 나는 대답했다.
"새 똥의 대가가 이거라면 100번이라도 맞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