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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Aug 12. 2018

*13. 여행 일기 쓰기를 시작한 이유

170923

 억수같이 쏟아붓는 빗 속에서 Nina Simone 의 노래를 감상하며 달리다 보니 어느새 포스 호텔 Nupar 에 도착했다. 현재 시간 오후 2시, 오늘의 여행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 들어오기엔 이른 시간이지만, 고단했던 어제 캠핑과 야속한 오늘 날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행 일정을 수정해야만 했다.  

포스호텔 Nupar 외부 전경

 포스 호텔 Nupar는 좌에서 우로 99개의 모든 객실이 이어져있는 1층 건물이다. 낮게 좌우로 늘어진 호텔은 그 뒤로 보이는 널찍한 구릉의 기다란 능선과 잘 어울린다. 실제 전경은 예약할 때 참고했던 사진보다 훨씬 더 인상적이다. 둘의 가방, 두 개의 캐리어, 카메라와 신발 가방, 아이스박스, 장바구니.. 모든 짐을 내리고 프런트로 간다.

포스 호텔 Nupar 레스토랑

 체크인은 오후 4시부터라고 한다. 하는 수 없이 로비 옆에 위치한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긴다. 우리 둘 뿐인 한적한 이 곳에서 남은 2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하나. 사실 고민할 것도 없다. 아내는 노트북과 카메라들을 연결하여 그동안의 여행 사진들을 보기 시작했고, 나는 노트와 만년필을 꺼내어 쓰고 있던 일기를 채워간다.  

 그러고 보니 야간 비행기에서, 일정을 마치고 쉬러 온 숙소에서, 캠핑장 서비스 하우스에서, 틈만 나면 펜을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반드시 써야 한다는 강박이 생긴 것 같다. 꼭 여름방학 마지막 날 수준이다. 재밌는 것은 나 스스로 일기를 쓰는 시간을 꽤나 즐긴다는 것이다. 이 분주한 여행 일정 중에 대체 무엇 때문에 생고생을 사서 하게 되었을까. 탓인지, 덕분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이유는 모두 아내 때문이다. 일기의 소재이기도 하고, 독자이기도 하고, 글의 동기이기도 하다.

정전이 되어 레스토랑에 불이 꺼진 상황, 사람들은 갑자기 환호성을 지르기도.

 여행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주어지는 대화의 시간은 엄청난 소재 거리를 양산한다. 함께 웃고 떠드는 사이에 나중에 기억하고 싶을 만한 이야깃거리를 수도 없이 만들어낸다. 흘러가는 시간들 속에서 잡아 쥐고 싶은 서로에 대한 수많은 의미와 영감들, 기록으로 남기지 않을 수가 없다.

맑은 날에는 방에서도 저 들판 너머 요쿨(빙하)이 보인다고 한다.
"여보, 들판 보러 나간거 아니야? 거긴 옆 객실.."

 아내는 정말 좋은 독자다. 누구의 관심 하나 없어도 이상하지 않을 이 글조차도 아내는 몇 번이나 읽어 주며 교정과 교열까지 봐준다. 연애 시절부터 그랬다. 달랑 편지 한 장을 써서 줘도 아내는 몇 번이나 곱씹으며 읽어주고 마음을 이해해주고 진심으로 울어줬다. 형편없는 글 수준에 못 미치지만, 어떤 베스트셀러보다 재미있게 읽어주는 소중한 열성 팬이다. 그런 사람을 생각해서 한 글자, 한 글자를 적어 내려 간다. 마치 '아미'를 생각해 다음 앨범에 열과 성을 다하는 '방탄 소년단'의 마음이랄까

아내가 서랍 속에 고이 묻어둔 현 남편, 구 남친이 보낸 편지 글

 앙투라지(entourage)라는 프랑스어가 있다. 누군가의 삶의 반경 주변에 있는 측근자, 주위 사람을 뜻하는 단어다. 요즘은 미국 유명 시트콤의 역향으로 할리우드에서 감독, 작가, 배우들이 함께 무리를 지어 작업을 이어가는 것을 가리킬 때도 사용한다.


 작은 일기 글에 헤밍웨이까지 끌어드리는 것이 실례겠으나,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지방의 작은 신문사 기자에서 역사에 길이 남는 대문호로 성장한 이유는 믿음직한 앙투라지들이 그의 범주 안에 있었다.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는 그의 글을 다듬고 만져주었으며, 소설가 셔우드 앤더슨은 실질적인 조언으로 헤밍웨이를 등단하게 만들었다. 당시 예술가들의 대모인 거트루드 스타인과 서점상인 실비아 비치는 그의 재정적인 후원과 삶의 멘토로서 그를 도왔다고 한다. <노인과 바다>는 이미 천재였던 고독한 예술가의 인생의 일로에서 스스로 만들어 낸 작품이 아니라 그를 중심으로 둘러싼 원 안의 앙투라지들이 함께 만든 것이다. 앙투라지가 없었다면 그의 작품도 없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에서 등장하는 헤밍웨이, 그를 만든 멋진 주변인들이 영화에 속속 등장한다.

 내 일기는 헤밍웨이는커녕 그냥 헤매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우리 부부의 인생을 관통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나름 소중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이 글의 이유는 여행의 동행과 이야기 소재와 글의 독자와 편집자 등 여러 역할이 되어주는 나의 앙투라지 아내에게 있다. 깊은 감사의 표시로 호텔에 오기 전 마트에서 구매한 빵, 그 사이에 소시지, 양파 튀김, 치즈와 루꼴라를 한데 넣은 핫도그를 만들어 저녁 식사를 대령한다. 아이슬란드 핫도그 맛집의 특유 소스도 넣었다. 레이캬비크에서 사 먹었던 핫도그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


 아내와 만든 즐거운 에피소드가 많다는 것은 어쩌면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작용해왔기 때문 아닐까 싶다.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살게 만들고 우리의 여행을 더 멋지게 만들고 있는 나의 앙투라지와 치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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