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의 성장이 필요한 조직
“네. 그럼 자세한 일정은 비서 통해서 조율해보시죠.”
대표의 시간이 회사의 중요한 자원이라, 그의 일정을 조정하고 업무를 지원하는 직무인 ‘비서’. 방금 출발 선상에 서있는 작은 스타트업이 조직도에 포함시키기엔 지나친 바람이겠죠? 분주한 일정을 보내고 있지만, 캘린더 앱이나 스마트폰의 알람 기능으로 일정들을 놓치지 않고 있고, 여러 가지 협업 툴과 공유 문서로 여러 작업을 충분히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당장 비서실부터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약도 없다는 이른바 ‘대표병’의 일종인가요?
물론 비서실이 필요할 정도로 회사가 성장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모두의 시간과 힘을 들여 일을 하고 있죠. 시장에서의 폭발적인 반응, 투자사로부터의 투자유치 등 많은 성과를 만들어 회사에 새로운 신규 인원과 수많은 프로젝트들의 열기가 가득 차 숨쉬기 힘들 때쯤 비서를 비롯한 관리 영역에서의 많은 리소스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 때도 아닐 수 있겠지만 확실한 시점은, 지금은 아니라는 겁니다.
제가 당장 필요하다는 비서실은 대표를 보좌하며 서무와 서기를 주관하는 팀이 아닙니다. 비밀(秘)과 책(書), 비서의 한자 풀이 그대로 비밀스럽게 책을 만드는 팀입니다. 비밀의 책? 이게 무슨 판타지 무협 소설 같은 이야기일까 생각하시겠지만, 스타트업이라면 이 말장난같은 팀의 이름과 업무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저희와 같은 콘텐츠 비즈니스를 펼치는 조직은 (부디) 이 글에 공감을 보내주리라 생각하고요. 왜 비밀의 책이고, 스타트업일까요. 지금부터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아, 미리 밝히지만 이 글은 무협 소설은 아닙니다. 물론 스타트업계가 강호의 고수들이 저마다의 신통방통 신공들을 펼치는 무림 같기는 합니다만.
저희는 교육을 주제로 다양한 교재와 책, 영상을 만들고 있는 콘텐츠 회사입니다. 콘텐츠 비즈니스 모델에서의 중요한 자산은 무엇일까요? 매출을 일으키는 저작물 콘텐츠, 지식재산권, 분석을 위한 데이터 등도 중요하지만, 그것에 앞서 그것들을 만들어내고 실현시키는 사람들이 더 중요합니다. 그중, 원류를 만드는 원작자들도 중요하지만, 호러 킹의 대부 스티븐 킹이 "창작은 인간의 일이고, 편집은 신의 영역이다."라고 자신의 글쓰기 책, <On Writing> (김진준 옮김, 김영사, 2002)> 에서 말한 것처럼, 최종 결과물 형태로 만들기까지 편집자들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결국 편집 전 과정에서 내부 구성원들의 의사 결정이 양질의 콘텐츠를 만드니까요. 신선한 재료를 준비하는 것과 음식을 맛있게 조리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처럼 말이죠.
그렇다면 콘텐츠의 퀄리티를 좌지우지하는 구성원들의 의사결정은 무엇이 영향을 줄까요? 훌륭한 의사결정의 값은 ‘어디까지 고민했는가’x와 ‘얼마나 빠르게 판단하는가’y, 이 두 가지가 결정합니다. 그렇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두 상수의 값에 영향을 주는 것을 말해보자면, 고민의 무게 x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획득한 개인의 통찰이, 판단의 속도 y는 수준 높은 책임 의식과 자기 검열의 정도가 결정합니다. 질량과 가속도가 물체의 작용하는 힘에 영향을 준다는 뉴턴의 운동 제2법칙(F=ma)이 생각납니다. 이 수식이 일정한 중력이 존재하는 지구 상에서만 적용되는 법칙인 것처럼, 위의 의사결정의 법칙 또한 선행되어야 하는 필수 조건이 있습니다. 개인이 자신의 xy, 역량을 오롯이 펼칠 수 있도록 (또는 펼치고 싶도록) 만드는 인사 체계를 비롯한 조직 문화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비서실은 이런 생각의 결론입니다. 그들의 역량을 꺼내도록 동기를 제공하고, 그것을 발전시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전 그것이 바로 구성원들 스스로 자신의 책을 만드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비서실을 통해 만들고 싶은 비밀의 책은 조직 구성원들의 책, 개개인들이 저자로 등록된 책입니다. 회사는 그들이 책을 출판할 수 있도록 교육과 기획, 제작을 물론 마케팅까지 지원합니다. 더 팔릴만한 것들을 만들어 매출을 올리기도 숨 가쁘지만, 회사가 굳이 모든 구성원의 책을 만들어 주려는 이유는 모든 구성원이 ‘작가’가 되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비서실은 '직원'을 '작가'로 만들도록 돕습니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반복된 일상 속에서도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하고 무심히 지나치는 순간의 영감에도 예민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소재를 찾아 자신만의 특별한 문장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발생한 문제 역시도 좋은 소재가 됩니다. 어느 여행 작가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더운 나라를 여행 중에 길거리 음식을 사 먹는데, 음식 속에 작은 벌레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소리 지르며 경악했다고 합니다. 배가 고파 예민한 상황이었을 텐데 굉장히 불쾌했을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작가님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당혹스러움보다 '오늘 쓸만한 좋은 소재를 찾았다!'라는 안도감이 더 컸다고 합니다. 원효대사의 해골물처럼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상황과 사건을 인식하는 것이 달라진다는 의미겠습니다. 원효 대사도 해골물 에피소드가 천 년 동안 전승되는 걸 당시에 알았더라면 마시는 순간 더 달콤하지 않았을까요.
“작가가 어떤 불행도 마주하지 않고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해요?”
루이제 린저(Luise Rinser)의 소설 <생의 한가운데>에서 주인공에게 던지는 말입니다. 작가는 문제를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닥친 문제와 이를 해결하는 과정은 작가에게 좋은 소재입니다. 혹 해결치 못하더라도 훌륭한 글 밥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문제를 향해 열린 사고를 하며, 이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합니다.
허나 그렇게 생각하고 쓰는 것만으로, 분량을 그저 채우는 것으로 작가의 역할이 끝나지 않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결과물을 거듭해서 평가하고 고쳐 나갑니다. 퇴고의 단계입니다. 자신의 결과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 기어코 완성했다고 생각한 글을 다시 처음부터 샅샅이 읽어 내려가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혹독한 자기 통제가 필요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즐기고, 자기 평가에 철저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 그것이 앞서 말한 xy(역량)를 발전시키는 과정이며, 그래서 사자가온다(주)는 모든 구성원들이 작가가 되는 것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아직 이 업무를 주관하는 비서실은 존재하지 않지만, 사자가온다(주)는 출판을 하고 있으며, 진행하는 사업 중 일반인들이 글을 쓰게 하고 글쓰기를 돕는 서비스(www.501g.kr)가 있습니다. 이 같은 솔루션을 내부 구성원들에게도 적용하고 있으며, 모두 업무에 유관한 주제를 선정하여, 비밀의 책 작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누구는 기획을 하고 있고, 누구는 브런치 작가가 되었으며, 누구는 글을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구성원들 모두 작가로서 업무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언제 출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업무의 ‘숙련’과 ‘전문성’은 그 과정의 자연스러운 부산물일 것입니다. 게다가 ‘인세’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좋은 결과가 있다면, 두둑한 보상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작가가 되어가는 일련의 과정과 그것의 결과는 지속적으로 업무에 ‘몰입’을 제공하여, 개인은 성장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특히 새롭게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창의적인 역량이 계속해서 요구되는 콘텐츠 기획자에게 꼭 필요한 구조라 생각합니다. 미하이 칙센트는 <창의성의 즐거움>, (북로드, 2003)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결국 행복한 삶의 비결은 우리가 하는 일에서 몰입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일과 가정생활 자체를 목적으로 할 수 있다면 삶을 낭비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의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성장 없이는 조직의 성장도 없습니다. 그것을 위해 개인의 하루 24시간을 다 쓰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조직의 논리를 펼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조직은 개인들에게 업무에서의 몰입을 어떻게 제공할 것이냐에서 출발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주인의식’이라는 기괴한 단어를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주인도 아닌데, 그 의식을 가져야 한다니요. 준하는 권리라면 또 모를까, 뜻 자체에 어폐가 있는 단어로 개인의 능동적인 태도를 뻔뻔하게 요구하였습니다. 저는 ‘작가의식’으로 이 같은 문제를 당당하게 해결해보고 싶습니다. 업무를 병행하며 출판을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양한 기회와 보상을 얻으며 더욱 업무에 몰입하였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비서실의 설치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야근과 격무는 사회악이라는 시선, 업무와 일상을 정확하게 구분 짓는 것만이 미덕이라는 분위기가 만연합니다. 혹 개인과 회사가 성장하지 못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우려됩니다. 전기만 공급되면 항상 최고의 퍼포먼스를 만드는 AI라면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사람이고, 또 대부분 기인이 아니라 범인인걸요. 최근 보이저X의 남세동 대표의 페이스북 댓글에서 대규모 토론회가 있었습니다. 주제는 스타트업 52시간 근무제였습니다. <19세에 대박 ‘스타 창업자’…왜 '52시간제' 반기 들었나> 링크(중앙일보)에서 "지식 노동에서는 일과 공부, 일과 취미의 구분이 힘든 경우가 많다” 남세동 대표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물론 인간은 일상 속의 소중한 행복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행복을 찾고, 지키기 위해서는 정신적이나 물질적으로 어제보다 더 나은 상태가 되어야 하고, 반드시 노력과 분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안주하는 상태에서는 성장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길가에 핀 풀만 봐도 알 수 있는 자연의 섭리입니다. 그런데 성장이 필요한 이에게 그 기회로부터 철저히 배제하게 만드는 것은 너무 과도한 박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풀을 꺾고 햇빛을 차단하면서 경력 같은 신입만을 원하는 세상,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개인들의 성장을 향한 열망은 전보다 훨씬 강하다 생각합니다. 기술의 발달로 인해 '어떻게 하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까?' 고민하는 강박을 기본값을 가지고 있으며, 스마트폰 속 즐비한 온라인 클래스 광고만 보아도 많은 이들이 틈틈이 관심사를 넓히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에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SNS에는 새로운 도전의 사진과 해시태그 일색입니다. 이쯤 되면 자기 계발하지 않는 것을 해악으로 여기는 세상 아닌가요. 거기에 사이드 잡과 부캐라니요. <직장인 70% "본업外 '부캐' 갖고 싶어"> 링크(사람인)
특히 MZ라 불리는 세대는 이런 두드러진 경향으로 '조직과 일에는 관심이 없는 세대', '개인의 영달에만 목메는 세대'라며 오해 섞인 시선을 받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단순히 일에 몰입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것이고, 개인과 조직의 성장의 인과관계 속 존재하는 불합리 때문에 설득되지 않은 것뿐입니다. 저는 ‘작가의식’이 어느 세대보다 성장 욕구가 강한 MZ 세대들에게, 업무에서의 필요한 태도와 동기를 만들어줄 것이라 기대합니다. 개인 브랜딩에 반응하고 추구하는 세대에게 그것을 함께 만드는 조직, 비빌 언덕이 되는 조직은 소속감의 대상을 넘어 존재 자체로 매력적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채용 면접에서 '본인만의 책을 만든다면?’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들고 싶은가?’ ‘혹은 만들어 왔는가?'를 가장 중요하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기업의 브랜드만이 아니라, 기업에 속한 구성원이 누구이며 어떤 브랜드를 가지고 있느냐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시기가 됐다. 기업이나 조직은 주어진 일을 잘 수행하는 직원이 아니라, 무엇이 필요하며 어떤 행동을 취하고 구체적인 임팩트를 어떻게 창출할 것인지 자주적으로 생각하고 조직 내에서 협업하며 내외부의 자원을 연계할 수 있는 사내기업가가 필요하다."
전남일보, <[임팩트 시대가 왔다] 회사보다 더 유명한 직원들이 많아지는 시대>, 김정태 엠와이소셜컴퍼니(MYSC) 대표이사의 인터뷰에서
향후 회사 입구 한켠, 가장 잘 보이는 벽 한 곳에 구성원들의 책으로 전시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유명 작가들이 가득한 콘텐츠 회사. 상상만으로 가슴이 뜁니다. 그래서 저 또한 지금 이렇게 지하철 출근 길, 사람들 사이 한 자리에 몸을 욱여넣고 글을 씁니다. 아직 조직도에만 없을 뿐이지 비서실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 졸필도 책으로 만들어 주실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