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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Jul 12. 2021

발가벗고 참석한 주주총회

대표를 몰아부치는 팀원들

 주주총회가 열리는 날입니다. 사무실 임차 건과 앞으로의 유상 증자 계획을 주주들과 결정해야 하는 중요한 날. 5명의 주주들이 모두 팀원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늘 해왔던 회의들과 큰 차이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평상시와 달랐던 하나는 제가 상당히 예민해져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회의 전까지 사업화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지원 사업의 원격 발표 평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다른 지원 사업에서 서류 평가조차 통과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발표 평가의 자리가 굉장히 절실했다 보니, 여기에 에너지를 소진한 까닭이었죠.


 지원 사업에 선정된다면 회사 운영에 도움이 되는 큰 자금을 받습니다. 계획한 사업의 방향으로 더욱 속도를 낼 수 있기 때문에 더없이 좋은 기회라 여겼습니다. 또 지금이 저희 같은 극초기 스타트업에게 다소 숨이 차오르는 구간이다 보니, 우리가 잘 달리고 있다는 사실과 사업의 방향성에 대한 좋은 평가가 굉장히 고팠던 것 같습니다. 주어진 7분의 발표와 8분의 질의응답 시간. 모든 것을 쏟아낼 수 있도록 그동안 정말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이 자신감이 철저한 준비로 인한 것인지, 막연한 기대에서 오는 것인지는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전자이길 바라며 발표에 임했습니다.

"후자라니!"

 후자였습니다. 평가 위원들의 예상치 못한 질문들로 당황하여, 질의응답 시간의 일부를 허비했습니다. 더구나 원격으로 진행하기 때문에  발표에  부담이 없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평가 위원들의 건조한  눈, 코, 입들로 가득 찬 화면이 주는 냉랭한 분위기는 발표자를 긴장감으로 압도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우리의 그동안의 성과를 매력적으로 설명할수록, 앞으로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밝힐수록 파고드는 그들의 냉혹한 질문은 제가 입고 있었던 것들을 하나씩 들추는 듯했습니다.


 분명 멀리 떨어져 있었고,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저에게 불리한 상황은 이 물리적인 조건들을 뒤집어 바로 앞에서 심사받는 것 같은 착각을 만들었습니다. 15분의 시간도 굉장히 길게 느껴졌고, 등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느껴질 만큼 모든 감각을 바짝 서도록 만들었습니다. 물론 화면 속 그들 또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것이며, 제 발표 준비와 멘탈이 부족했을 뿐입니다. 그것을 이겨내지 못한 까닭에 평가가 끝나고 한참을 노트북 화면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인쇄해두었던 발표 스크립트 한 켠에 펜으로 끄적거렸습니다.


발가벗긴 기분이다.

 거울은 보지 못했지만, 얼굴이 붉어져있지 않았을까요. 홀로 큰 회의실에서 예민해진 마음을 삭히고 있었습니다. 몇 분 후, 팀원들이 들어왔습니다. 본격적인 임시주주총회를 하기 전, 궁금해하는 이들을 위해 차분한 척하며 발표 평가의 후기를 공유했습니다. 아직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선정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겠다는 솔직한 의견까지 모두 전했죠. 팀원들은 표정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분명 굉장히 아쉬웠을 것입니다. 이런 의기소침한 분위기에서 주주총회를 잘 진행할 수 있을지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사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한 것과는 다르게 주주들의 치열한 의견들이 오고 갔습니다. 의사록을 남기는 경영 이사님의 속기는 정신없었습니다. 계획보다 시간이 연장되어 결국 신성한 점심시간을 한참 미루기까지 이르렀습니다. 대부분은 개선이 필요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동안 정말 문제가 많았더군요. 그렇다 보니 구성원을 이끌고 있었던 입장에선 따가운 문책과 추궁으로 느낄 수도 있었습니다. 대표 이사를 따갑게 몰아붙이는 격렬한 모습으로 보아도 무리가 아니었을 겁니다. 경영 이사님께서 회의 분위기를 진정시켰을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재밌는 것은 이 날 선 분위기가 오히려 극도로 예민해있던 저를 다시 정신 차리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평정심을 찾으며, 머리가 상쾌해지고 있었습니다. 함께 나누는 이야기들을 신나게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활력이 생겼던 이유는 이들의 맹렬함이 결국 미래의 기대와 확신이 전제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들이 열을 올릴 이유가 있을까요. 주주총회 전에 오늘 처음 만난, 그것도 아주 잠시 동안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에게 휘둘렸던 스스로를 반성하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이 글을 빌어 정신 차리게 해 준 팀원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해봅니다.


 기록을 글을 옮기는 중에 어느 축구 경기가 떠올랐습니다. 19-20 시즌 챔피언스리그 리버풀 vs 잘츠부르크 2차전. 잘츠부르크 소속의 황희찬 선수가 세계 최고의 수비수인 리버풀의 반 다이크를 멋진 페인팅으로 속이고 골을 넣은 경기로 국내 축구팬들에게 유명한 경기이죠. 당시 리버풀은 영국을 넘어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팀이었고, 잘츠부르크는 그에 비해 오스트리아라 분데스리가라는 변방 리그에 소속된 팀이지만, 유럽 챔피언스리그에서 신선한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던 팀이었습니다. 경기 결과 두경기 결과 두 팀이 분전하여 3:3으로 끝났던 이 경기가 문득 생각난 이유는 하프타임에 잘츠부르크의 감독, 예시 마르시가 라커룸에서 선수들을 향한 거친 호통 때문입니다. 


"씨x, 너넨 너무 상대를 존경하고 있어. 여긴 챔피언스 리그야."

"가장 중요한 건 이기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너희 플레이를 하는 거야."


 당시 그들은 전반에만 3:0으로 지고 있었고, 잘츠부르크의 플레이는 관중들이 보기에도 주눅이 들어있었습니다. 예시 마르시 감독은 라커룸에 들어가 지친 선수들을 향해 호되게 다그칩니다. 흥분한 그가 영어와 독일어를 섞어가며 쓰는 말은 자막이 아니면 알 수가 없지만, 비속어는 아주 잘 들리네요. 아마 선수들도 저처럼 정신이 맑아지지 않았을까요. 간절한 그의 진심이 선수들에게 닿았는지, 후반전의 잘츠부르크는 전혀 다른 팀이 되어있었습니다.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던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지고 있던 경기를 뒤집어 결국 무승부로 만들었습니다. 


 오늘 이 회의실이 꼭 잘츠부르크 선수들이 정신 차린 라커룸 같습니다. 소중한 동료들이자 든든한 주주 분들께서 제가 잠시 있고 있었던 것을 호되게 일깨워주셨죠. 맞습니다. 우리 앞에는 개선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실력도, 믿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직 저희가 갈 길이 너무 많이 남아 전반전이 끝났다고 하기엔 어울리지 않지만, 심기일전하여 휘슬 불기 전까지 역전해볼랍니다. 벗겨진 옷가지들 주워 한 번 털고, 다시 입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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