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오늘부터 호은당(4)>
“그리고... 언니. 우리 약방 언니한테 사과해야지. 이 도자기, 언니가 깼어? 이거 내가 약방 언니 생일 선물로 준 건데! 언니가 깬 거 아니지? 이거 진짜 귀한 건데!!”
“그, 그게... 제가 좋은 걸로 많이 구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물론 보상도 충분히 하고요.”
세상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릇 쪼가리라며 비하하고 고함치던 아줌마가 저렇게 굽실거리다니. 은미 씨가 돈이 많은 이유를 알겠네. 저 둘, 짜고 치는구나. 사기네, 사기. 사기단이었다. 에이, 시발. 때려치워야지.
“음. 그래야 해. 언니 업이 무거워. 알지? 자꾸 죄짓지 마. 그거 다 아들한테 가. 언니 이제 마음 곱게 안 쓰면 진짜 손주 못 봐. 마지막이야. 언니, 착하게 살아. 그래야 아들이 살아. 내가 그랬지? 언니, 그 집에 간 거 누구 덕?”
“서, 선녀님...”
“언니 아들 잘 된 거 누구 덕?”
“... 선녀님...”
“언니 남편 대박 터진 건?”
“......”
“언니, 난 거짓말 안 해. 알지? 그리고 난 아무나 안 도와줘. 언니니까 도와준 거야. 알지?”
“... 예...”
“약방 언니, 나한테 은인이거든? 나 죽을 뻔한 거 살려준 거, 약방 언니야. 언니도 알지? 언니 아들 사고 막아주다가 선녀님한테 나 혼난 거, 알지? 그때 나 죽었으면 언니도 언니 아들도 끝이었어. 그거 막아주고 언니 지금 그 자리 앉게 해 준 사람이 이 약방 언니라고. 약방 언니 없었으면 언니도 언니 아들도 지금 없어. 알지? 언니 진짜 은인은 내가 아니라 이 약방 언니야. 알지? 내 말, 무슨 뜻인지.”
이건 또 뭐야? 갑자기 막장 드라마에서 미스터리 극장이 됐다. 하... 안 되겠다. 진짜 그만둬야 할 것 같다. 무당이랑 약사랑 짜고 저러는 거, 옆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방조죄로 잡혀 들어갈지도 몰라. 서빙하다가 쇠고랑 차게 생겼다. 내가 그동안 받은 것도 있고 얻어먹은 것도 있으니 신고하거나 소문내지는 말고, 조용히 그만두자. 그냥... 오늘 서빙 좀 해보니 나랑 안 맞는 것 같다고 하고 그만두자. 일당이고 뭐고 받았다간 큰일 날 것 같으니... 오늘 일 한건 그냥 지금까지 얻어먹은 밥값이라고 치고... 하. 혹시 나 밥 사준 것도 저런 돈이라서... 나도 걸리는 거 아니야?! 아오! 진짜!
거, 누구더라... 진욱이 이놈 친구 중에 변호사가 있었던 것 같은데... 여차해서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주겠지? 난 무죄라고! 아무 죄가 없다고! 맞잖아? 착한 일 하고 밥 얻어먹은 것뿐인데... 용감한 시민 상 받는 줄 알았더니, 쇠고랑 차게 생겼네. 제발 나는 관련이 없길.
“...... 제가... 제가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무례한 언행으로 큰 실례를 했습니다.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깨진 도자기와 컵은, 최대한 정성껏 마련해서 곧 다시 오겠습니다. 노여움 푸시고... 용서하십시오.”
“아닙니다. 사모님께서도 속사정을 모르셨고, 저 역시 몰랐으니 그랬던 것뿐입니다. 저야말로 무례하게 굴어 송구합니다. 오늘 일은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고, 훌훌 털어버리시길 부탁드립니다.”
와. 어쨌거나 웃기긴 웃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이니 살리니 욕하던 아줌마가 저렇게 사죄를 하고, 아까 미친 은미 씨는 어디 가고 다시 원래 은미 씨가 돼서 천사처럼 저러고 있고. 소름 끼친다, 진짜. 하긴. 저 정도 연기력은 돼야 사기를 치지. 한두 푼 사기 치는 것도 아니고, 몇 천 단위로 사기 치나 본데... 저러다 걸리면 어쩌려고 저러지? 뭐... 약점 쥐고 있으니 걸릴 일은 없는 건가. 참... 세상 더럽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녀님.”
그게 감사할 입니까, 이 아줌마야. 사기꾼들한테 탈탈 털리고 있잖아. 뭐, 돈이 썩어 돌아서 이 사람들한테 몇 푼 털려도 아무 문제없다, 뭐 그런 건가.
“응. 언니, 내가 조만간 전화할게. 다짜고짜 아들 족치지 말고, 뒤를 캐서 증거를 잡아. 며느리 마음 풀어주는 거 잊지 말고. 걔네 조상신이 좀 세. 꼭 며느리 잘해주고 사돈집에도 섭섭잖게 잘 설명하고. 알지? 언니. 지는 게 이기는 거야.”
지는 게 이기는 게 맞긴 한데... 지금 이 상황에서 그 말은 아닌 것 같지 않나요, 선녀님?
“......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선녀님, 이번에는...”
“어... 이게 출장이긴 한데... 약방 언니가 불러서 온 거니까, 이번에는 그냥 가방 하나만 해 줘. 작은 걸로. 언니가 골라주는 가방이 난 제일 이쁘더라. 언니가 확실히 보는 눈이 있잖아. 언니가 준 거는 어딜 가지고 가도 꿀리지가 않아. 다들 이쁘다고 얼마나 칭찬하는데. 언니 덕에 내가 잘 돼. 늘 고마워.”
허... 허허허... 이젠 더 이상 놀랄 가슴도 없다. 어이가 없어서. 놀랄 것도 없네. 당장 집에 가고 싶은데, 내 가방이랑 옷이 저 방에 있어서 가지도 못 하고... 담배 땡긴다, 우와.
“별말씀을요. 그럼 조만간 이 비서 보내겠습니다.”
“응, 언니. 가자, 배웅할게!”
드르륵. 문이 열리고 나는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중년 부인과 선녀라는 모델, 아니 무속인과 은미 씨가 주르륵 나오더니 저 멍청이는 뭐지? 하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괜히 디딤돌의 신발들을 가지런히 돌려주고 쟁반을 챙겨 주방으로 도망쳤다. 뭐지, 나 머슴인가. 뭐, 돌쇠, 이런 건가. 자괴감이 든다. 거기서 졸아서 신발 놔주고 도망치다니. 맙소사. 뭐 하는 거냐, 박정우! 너 언제부터 이렇게 찌질했는데!
“언니, 저 오빠가 그 오빠?”
“응.”
“그렇구나. 딱이네.”
뭐가! 뭐가 딱인데! 난 댁들이랑 같이 사기 칠 생각 없어요! 나는 정말 법 없이 사는 착한 사람일 뿐이라고! 돈이고 뭐고 필요 없으니까 끌어들이지 마요! 어쩐지, 월급 삼백이 적냐고 하더라. 사기 동업자로 쓰려면 삼백이 아니라 삼천은 줘야 하는 거 아냐? 나 참. 이럴 줄 알았으면 한 오백 달라고 할 걸. 괜히 줄였네. 아니, 아니지. 난 당장 때려치워야 해. 여기서 일 할 수는 없다. 이건 아니다. 저 두 마녀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뭐가 딱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댁들의 기준에 절대 부합하지 않을 거니까 포기하시길.
“됐거든.”
주방에서 최대한 조용히 나오는데, 은미 씨가 피식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움찔. 괜히 움츠러들었다. 은미 씨는 내가 움찔거리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조금 전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는지, 깨달은 얼굴을 하고 얼른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나는 머뭇거리다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어쨌거나 지금은 직원이니까. 인사는 해야지. 쟤네들, 지지고 볶다가 이제 하하호호하니까... 적어도 안녕히 가시라 인사 정도는 해야 착한 돌쇠겠지. 저 아줌마 보내고, 때려치우자.
“실례가 많았습니다.”
중년 부인은 올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180도 변한 우아한 목소리와 태도로 공손하게 인사했다. 은미 씨도 다를 바 없었다. 살기 같은 냉기를 풀풀 날리던 사장님은 어딜 가고, 얌전하고 차분하고 지적인 약사가 서 있다. 위험하다. 여기, 위험해.
“아닙니다. 개의치 마십시오. 살펴 가시고... 혹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예. 곧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뭐, 사과 상자 들고, 명품 백 들고 온다는 말일 것이다. 아니, 그 모습 따위 상상도 하기 싫다. 상상만으로도 사기 공범자가 되는 기분이다.
“언니, 내가 한 말 꼭 명심해. 알겠지? 그래야 언니가 살고 언니 아들이 살아. 그래야 지금 쥔 거 계속 쥐고 있을 수 있어. 알겠지?”
마녀 아니야, 마녀?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그 집 가장을 멀쩡한 본처 내쫓고 멀쩡한 자기 자식 갖다 버리게 하고, 첩에, 첩이 데리고 온 남의 자식을 키우는 호구를 만든 거지? 도대체 그 남자는 어떤 병신인 걸까. 아니, 상식적으로 그걸 마음대로 할 수 있어? 내 상식으로는, 내 도덕적 관념으로는 납득이 안 된다. 무서운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
“예, 명심하겠습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럼...”
그걸 명심까지야... 부인은 힐긋 나를 돌아보더니 재빨리 위아래를 훑었다. 기분이 살짝, 아니 많이 나빴다. 하지만 개량한복 덕분에 그녀는 내가 한통속으로 보였는지, 별다른 변화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아줌마, 미친 거 아닙니까! 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충실한 돌쇠는 허리를 접었다.
“아, 예. 안녕히 가십시오.”
부인은 우리를 향해 허리를 깊게 숙이고 조용히 나갔다. 문이 닫히자, 그 옆에 비딱하게 서 있던 어설픈 입간판이 툭 넘어졌다. 아까 저 부인이 들어올 때 가방으로 힘껏 쳤던 것이 기억났다. 슬그머니 눈을 돌려보니, 아. 역시. 앙상한 각목 다리가 부러져 있었고 나름 개성 있게 쓴 걸로 보이는 삐뚤삐뚤한 글자들이 빼곡한 나무판은 날카로운 나뭇결을 드러내며 부러져 있었다. 그것이 툭 하고 넘어진 그 순간, 나는 나를 향해 날아오는 날카로운 두 쌍의 시선을 느꼈지만 무시했다. 성큼성큼 걸어 부서진 입간판을 집어 들었다. 내 딴엔 멋있게 걸어간 거라고 느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색하게 걸었던 것 같다. 두 쌍의 시선은 집요하게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무시할 수는 없다. 나는 간판을 손에 든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 이거 부서져서 다시...”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 그녀들을 보았다. 걱정과 불안이 뒤섞인, 그만둔다고 하면 어쩌지?라는 말을 얼굴에 그대로 써 놓은 은미 씨와 그만둔다고 말하기만 해 봐라, 확, 씨!라고 눈으로 욕하고 있는 선녀라는 무당이 나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바르르 떨리는 입 꼬리를 애써 끌어올렸다.
“다시, 다시 만들거나 수리를 해야 하는데... 철물점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망가진 입간판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슬그머니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가방이고 옷이고 뭐고, 안중에도 없었다. 일단 여기를 벗어나자. 저 무당, 너무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