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방 호은당

<에피소드 1-오늘부터 호은당(E)>

by 혜니




“오빠, 잠시만.”


“... 예.”


선녀처럼 사뿐하지만 서슬이 시퍼런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나는 공손하게 빙글 돌아서며 고개를 숙였다. 젠장. 내가 전생에 돌쇠였나. 저절로 굽실거리게 된다. 미친. 출근한 지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따위 일이나 겪고 있어야 하냐고!

그건 그렇고, 어째서 저 목소리에 반박을 하거나 거부를 할 수 없는 걸까. 정말 무당이라서? 진짜 선년지 뭔지 하는 신이라서? 설마. 세상에 귀신은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귀신이나 그 외의 영적인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적도 없는 나에게는 무시무시하고 소름 끼치는 1초였다. 나도 모르게 눈이 내리깔리고 조아리고 싶어 졌다. 만약 조선시대나 고려시대쯤 됐다면, 나는 예, 마님. 하고 바닥에 엎드렸을지도 모른다.

선년가 뭔가 하는 여자는 불러놓고 좀체 말이 없었다. 그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무슨 의미야?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돌려버렸다.


“이 오빠, 백 좋네? 어디 나가도 몸 하나는 건사하겠어.”


이건 또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 두드리는 소린가. 나는 조금 전의 소란에 대한 변명이나 협박 등이 나올 줄 알았는데, 갑자기 내 덩치 이야기다. 그래. 내가 덩치는 좀 있다. 키도 이 정도면 내 또래에서는 좀 큰 편이고, 운동도 좋아하고 먹는 것도 좋아한다. 근육보다는 지방의 비중이 좀 더 높겠지만, 그래도 보기에 나쁘지 않은 몸이라고 자부한다. 식스팩은 당연히 없다.


“지금 그게 아니잖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던 은미 씨가 픽 웃었다. 나도 모르게 눌려있었던 어깨가 스르륵 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살그머니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보았다. 은미 씨는 여전히 불편한 얼굴로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고 무당은 형형한 눈으로 나를 훑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 주변을 살피는 것 같았다. 뭐, 귀신이 있다거나 수호신이 있다거나 그런 겁니까? 조상신이 붙어 있으면 로또 번호나 좀 주라고 하시던가.


“저... 정우 씨, 정말 죄송해요. 첫날부터 괴상한 꼴을 보여드렸네요. 일단, 정우 씨가 생각하는 그런 나쁜 일은 아니고요... 아, 이걸 다 말할 수도 없고. 그... 아무튼, 요즘 시대에도 아들만 원하는 어른들이 종종 있어요. 방금 저분도 그런 분인데, 사실 그게 거의 불가능한 일이거든요. 그래서 치성이라도 드리라고 했는데, 저분은 복용법이나 식단 조절 같은 기본적인 규칙은 하나도 안 지키면서 약발 없다고... 아니, 꼴랑 석 달 치 타 가놓고 뭐 벌써 손주 타령이래?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그리고 내가 아들 먹이라고 따로 준 약은 지 남편 처먹여놓고. 며느리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꿀떡꿀떡 처먹고, 아들이라는 새끼는 밖에 나가서 엄한 여자 붙들고 기부 쇼를 하고 있고. 집안 꼬락서니 진짜 개판이다. 진짜 개차반이야. 있는 집 새끼들이 더 해.”


구구절절 설명하던 은미 씨의 말이 점점 거칠어지더니 급기야 욕까지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뻘쭘한 자세로 멀거니 서서 혼자 씩씩 거리는 그녀와, 언제 자리를 잡았는지 정원 의자에 앉아 배를 잡고 깔깔 웃는 무당을 멍청한 얼굴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 동안 욕을 퍼붓던 은미 씨는 분이 좀 풀렸는지, 아니면 나라는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얼굴까지 붉히며 연신 허리를 굽혔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꼴을 보여드리려고 오늘부터 나오시라고 한 게 아닌데... 그만둔다고 하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오늘 일 하신 부분은 시급으로 계산해서 통장으로 이체해 드릴게요. 이런 일이 매번 있는 게 아닌데... 가끔 이런 분들이 계세요. 복용법 안 지켜서 살이 찌거나 머리색이 변하거나하는 부작용으로 찾아와서 화내시는 분들이 있는데... 대부분 본인들 실수로 그렇게 되는 거라... 저도 어떻게 못 하고 그냥 환불해 드리거나 다른 걸로 다시 지어드리거나 하는데... 오늘 이 분은, 진짜 제가 안 된다고 했는데... 어휴.”


벌게진 얼굴로 횡설수설 떠들어대는 은미 씨의 모습은 낯설었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살다 살다 한약 잘 못 먹어서 따지러 온 사람 환불해 줬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다. 복용법을 안 지켜서 일어난 부작용은 약사 잘못이 아닌데. 그걸 환불해주거나 다른 걸 만들어 줬다고? 어이가 없네. 이 사람, 땅 파면 약재가 나오나. 저런 사람들 여럿 상대해 본 모양이네. 그러니 저리 독하게 대들겠지. 안 그러면 어마어마한 피해가 날 테니.

그렇다고 무당이랑 짜고 사기 치는 건 아니지. 그만둬도 된다고 했으니 남자답게 말하자.


“아닙니다. 그만두긴요. 제가 문지기 잘하겠습니다. 저는 입이 꽤 무거운 편이거든요.”


그렇다. 나는 먹고살아야 하니까. 돈을 벌어야 하니까. 여기 일 한다고 주말 동안 열심히 밤낮도 바꾸어 놓았고, 주인집 할머니 약도 실컷 올렸다. 나는 돈이 필요하다. 젠장. 자본의 노예 박돌쇠.


“어머. 오빠, 멋지다.”


오빠라고 부르지 말아 주실래요. 소름 돋거든요. 어디 홍대나 그런 데서 저런 나이스 레이디가 오빠. 하고 부르면 멋있는 미소 지으면서 우리 베이비. 하겠는데. 댁은 좀 가주세요. 겁나 무서워요.


“그러지 말라니까. 정우 씨한테는 그러면 안 돼.”


“아, 왜? 우리 사이에. 그치, 오빠?”


우리 사이가 뭔데요. 어떤 사인데요. 왜요. 뭐요.

은미 씨는 드디어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리를 착 꼰 채 새침하게 웃는 무당의 어깨를 툭 치며 그녀는 연신 조심하라, 예의를 지키라며 잔소리를 해댔고, 무당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은미 씨를 약 올렸다. 친자매 같은 자연스러운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정신을 차렸다. 홀리면 안 된다. 둘이 아무리 알콩달콩 이쁘게 놀아도 저 두 사람은 사기꾼이야. 그것도 어마어마한 사기꾼. 있는 집 사람들 등골 쪽쪽 빨아먹는 사기꾼들.

혹시 이 사람들이 나중에 걸려서 어느 집 사모님한테 아들 낳는 약값으로 몇 천, 어느 집 사모님한테 본처 내쫓는 약값으로 몇 천 받았다고 진술하면... 그 사람들이 돈을 줬다고 할까? 아마 아니라고 하겠지. 그 옛날 대도 조세형 사건처럼. 이 사람들은 주인 없는 돈을 가진 게 되는 거 아닐까? 그럼 그 돈에 대해서 세금은 낼까? 혹시 현금영수증이나 카드 결제나 할부 같은 건 되나?

이거, 탈세 아니야? 세금은 제대로 내고 있는 거야? 아무래도 장부나 거래명세서 같은 거 있는지 보여 달라고... 아. 그래 봤자 이중장부겠네. 사기꾼들이니까.

멍청하게 돈의 노예인 이 돌쇠는 결국 사기꾼들의 문지기가 되겠다고 스스로 나서서 목을 맸으니...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저, 근데... 은미, 아니 선생님.”


왠지 갑자기 훌쩍 멀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불러야 하나. 선생님도 사실은 많이 거북하다. 이 사기꾼님아. 왠지 나의 소중한 보름치 날들을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한때는 여신이었던 사람이 한순간에 쓰레기 사기꾼이 되었다. 그간 들었던 눈곱만큼의 정이 호로록 날아가는 것 같았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이리도 없었던가.


“그냥 이름 부르셔도 돼요. 손님들 앞에서도 그래도 돼요.”


“아니요, 그건 제가 좀 불편합니다.”


그래. 이렇게 된 거, 선이라도 확실히 그어서 친분을 쌓지 말아야겠다. 계약서에 적힌 딱 그만큼의 일과 딱 그만큼의 돈. 그것만 주고받자. 문제 되지 않게. 앞으로는 체크카드만 쓰고 통장도 하나만 써야지. 적금이고 뭐고 다 안 해야지. 그 어떤 것도 연관되게 하지 않겠다. 나는 여기서 일을 하지만 이들이 사기를 치든 말든, 나는 내 할 일만 하겠다. 방조죄가 성립된다 하면 어쩔 수 없겠지만, 적어도 사기꾼은 되고 싶지 않았다. 형법적으로 사기꾼이 되더라도, 내 양심을 걸고 사기를 치지는 않겠다. 이들과 한 팀이 되어 등골 브레이커가 절대 되지 않으리라. 적어도 내 스스로는 사기꾼이 아니라고 납득할 수 있게, 깨끗하게... 될 리가 없잖아! 방조 자체만으로도 사기에 가담하는 건데! 아오! 진짜! 미치겠네!!


“사장님 해, 사장님. 언니 사장이잖아.”


“약사거든.”


내 고민은 전혀 모르는 두 사람은 또 티격태격 떠들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부서진 입간판을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어찌 됐든 영업은 해야 했고, 이걸 고쳐야 내놓을 수 있으니. 이걸 안 내놓으면 이 구석에 박힌 약방에 손님이 찾아와 봤자 얼마 되지도 않을 것이다.


“사장님 좋네. 백 사장님. 백사장. 좋네. 해변 같고 왠지 바다 가고 싶고. 언니, 우리 여름에 하와이 갈래? 발리도 좋겠다. 오빠도 같이 갈래?”


저건 또 무슨 개똥 같은 논리인가. 백 사장, 바다, 하와이와 발리. 참으로 눈물 나는 개그다. 근데 그 와중에 내 입 꼬리 놈아. 너는 왜 씰룩거리느냐. 부서진 입간판은 아무래도 다시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이 집에는 연장이고 나무고 없을 것 같으니, 퇴근길에 철물점이 있는지 돌아봐야 할 것 같았다. 나무는 요즘 인터넷으로 살 수 있던가. 아니지, 요즘 입간판도 얼마나 멋지고 예쁘게 제작 다 해주는데. 돈도 많은 사기꾼들이니 돈지랄하면 되지. 나는 휴대폰을 꺼내 최고급 입간판을 검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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