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방 호은당

<에피소드 2-벌레에 물린 아기(1)>

by 혜니



은미 씨는 장사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무당 동생과 마주 앉아 수다나 떨고 있었다. 나는 힐긋 두 사람을 살핀 뒤, 휴대폰과 망가진 입간판을 들고 대청마루로 슬금슬금 자리를 옮겼다.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제일 비싼 것들만 고르고 있는데 화살이 나에게 날아왔다.


“... 너 예약 없니? 좀 가라.”


“언니가 불러놓고 왜 이래? 곤란한 거 막아줬더니 서운하네! 난 우리 오빠가 우려 주는 차 마시고 갈 거야. 오빠, 나 우롱차 한 잔만 줘.”


우롱... 나를 우롱하는 거냐, 넌. 내가 왜 네 오빠야? 나보다 어린 건 맞냐? 나 오늘 첫 출근인데. 첫 출근해서 아직 여기 내부 구조도 모르는데. 화장실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저기 해골바가지 걸린 방 밖에 모르는데. 괴로운 자본주의의 돌쇠 우롱하지 말고 네가 좀 타 드세요. 하는 마음과는 달리, 내 몸은 자연스럽게 일어서서 주방으로 향했다. 그래. 그렇지 뭐. 아까 주방 벽장 가득 차 통이 있던데. 한국어는 아니었지만 어디 찾아보면 한글 설명 정도는 있겠지. 에휴.


“방금 첫 출근 한 사람이 어떻게 해? 네가 좀 끓여.”


터덜터덜 주방으로 가는 내 손목을 누군가가 턱 잡아끌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은미 씨였다. 작은 손으로 내 손목을 꼭 잡고 끌어당기는데, 그 힘이... 당기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당기는 것 같아서 슬그머니 끌려갔다. 진짜로 난 어느 잔에 어떤 차를 넣어야 할지 정말 모른다. 내가 마셔본 차는 티백에 든 현미녹차뿐이다. 은미 씨가 이끄는 대로 슬금슬금 그녀의 뒤로 다가가 섰다. 무당은 눈을 가늘게 뜨고 흘기며 나와 은미 씨를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팩 돌렸다.


“흥. 나 갈래. 손님 올 거야.”


손님이라면, 점 보러 오는 손님인가. 그걸 또 어떻게 알아? 예약이 있으면 재깍재깍 자리 깔고 손님 맞을 준비나 해야지, 여기서 죽치고 차 마실 생각이나 하다니. 저 무당한테 점 보러 가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개차반들인지. 사실 궁금하지도 않았다. 보나 마나 조금 전의 그 아줌마 같은 그런 사람들이겠지. 무당이 그 아줌마 대하는 태도를 보아하니, 그런 사람들을 주로 만나는 것 같았다. 욕심 많은 사람, 나 밖에 모르는 사람, 내가 제일 잘 나가 하는 사람. 뭐, 그런 사람들 돈 뜯는 거야 뭐. 기왕이면 한 오백 더 뜯어서 기부도 좀 하고 그래라. 그래야 진짜 의적이지.


“이따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은미 씨는 아직 점심도 먹기 전에 저녁 약속을 잡아버렸다. 그럼 오늘 일찍 퇴근인가요? 퇴근 시간은 8시인데, 저녁을 그때 먹지는 않으니까 조금 일찍 마치려나. 첫날부터 놀 생각이라니. 나도 참. 글렀다. 어쩌면 나더러 문단속하라고 하고 은미 씨만 가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 그게 더 정상적이지.


“생고기. 아니면 안 가.”


무당은 음식 아무거나 먹어도 됩니까? 하고 묻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스님들은 고기도 안 먹고 살생도 안 하잖은가. 무당도 불교 아닌가? 아님 말고. 저 여자가 생고기라고 하니, 왠지 피가 뚝뚝 흐르는 고깃덩어리가 상상됐다. 커다란 고깃덩이를 입에 물고 시뻘건 피를 주르륵 흘리며... 갑자기 남자의 생간을 빼먹는다는 구미호가 떠올랐다. 저 무당이랑 너무 잘 어울리는데! 선녀가 아니라 여우 아닐까.

은미 씨는 킬킬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무당은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발딱 일어났다.


“알았어. 잘 가!”


“언니, 오늘은 집에 있어. 오빠도. 이따 저녁에 내가 올게. 안녕!”


집에 있으라는 말이 왠지 뭔가 의미가 있는 말 같았다. 그녀는 또각또각 디딤돌만 골라 밟으며 경쾌한 걸음으로 약방을 나섰다. 나무문이 다시 쿵 닫히고 커다란 약방 안의 정원은 순식간에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와. 겁나 무안하네.


“그, 저... 주방이랑 차 우리는 법이랑...”


“아, 아! 네! 네. 어렵지는 않으니까 금방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은미 씨는 감전된 물고기처럼 펄떡 뛰며 일어나 주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도 그녀를 따라 걸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이것저것 묻지 말고 일만 하자. 이 두 사람이 사기를 치든 말든. 월급이나 따박따박 받으면 된다. 애초에, 이따위 사기로 걸릴 거였으면 진작 걸렸을 거다. 이 약방은 가업이라고 했으니까. 꽤 오래 이렇게 유지하고 있었다는 거겠지. 그럼 나름의 연줄이 다 있다는 거고, 걸려도 탈이 없다는 소리가 되렷다. 그럼 나는 오늘처럼 이런 일, 녹음이나 하고 가능하면 녹화도 하고 증거나 만들어 두자. 일단 나는 살고 봐야 할 테니까. 나는 일전에 침만 질질 흘렸던 디카의 가격을 떠올리며 잠시 고민했다.

은미 씨는 주방 정면을 가득 채운 벽장을 열고 차 통을 하나 꺼냈다. 그것이 우롱차라고 했다. 연보랏빛 종이로 싸여있는, 흔한 원통형 차 통이었는데, 열었더니 은은한 향기가 물씬 풍겨왔다. 우롱차라고 해서 굉장히 노티 나는 차 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향기가 좋았다. 그녀는 차 통 바닥을 보여주었다. 원산지와 제품명 등이 적힌 스티커가 떡하니 붙어 있었다. 그래.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지. 나는 백여 개는 됨직한 차 통들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그 뒤, 어마어마한 찻잔과 찻주전자, 머그잔부터 심지어는 사약이나 담을 것 같은 사발까지 빼곡하게 들어찬 찬장 세 개를 보여주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릇들은 저마다 담는 차가 정해져 있었고, 차 통과 똑같은 순서로 정리가 되어 있었다. 이름표를 붙이지 않아도 된다. 천만다행이었다. 대부분은 그저 평범한 도자기 찻잔이었고 고삼차만 잔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고삼차는 아무 잔에 담아줘도 절대 다 못 마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능에서는 다 먹던데. 혹시 또 몸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달라고 할지도 모르고. 더 달라고 하면 더 줘도 되냐고 묻자 은미 씨는 빙긋 웃었다.


“고삼차를 즐기시는 분은 알아서 티를 내실 테니, 그런 분들께는 저 잔에 드리면 됩니다.”


그녀가 가리키는 곳에는 투박하게 생긴 나무 잔이 있었다. 꽤 큰 크기였는데, 손으로 직접 깎아 만든 것 같은 거친 질감이 은근히 매력적이었다. 꽤 반들반들하게 잘 닦여 있었다. 내부는 이미 찻물 때문에 까무잡잡했다. 불그스름한 나무 잔과 나무로 된 잔 받침까지. 나무 잔은 총 네 개가 전부였다. 은미 씨는 거기에는 물만 담아도 고삼차 맛이 날 거라며 웃었다. 나는 진짜 그렇게 될까 궁금했다. 나중에 진짜로 물을 담아봐야겠다.

주방을 둘러보며 최신식 설비들을 만져보고 사용법도 익혔다. 커피숍에나 있을 법한 원두 분쇄기나 커피머신, 캡슐커피용 머신도 이것저것 넣어 맛도 보았다. 은근히 재미있었다.

잔들이 진열된 진열장 위와 사이사이에는 수납장들이 빼곡했는데, 안에는 모두 다과였다. 양은 많지 않았다. 사흘에 한 번씩 주문하고, 떡은 매일 저녁에 주문하면 새벽에 배달 온다고 했다. 수납공간은 어마무시했는데 들어있는 양은 알량했다. 은미 씨는 맛있다며 떡 하나를 꺼내 주었다. 색동저고리 소매처럼 예쁜 색깔로 줄무늬를 넣어 놓은 반달 모양의 송편이었다. 아주 말랑하고 쫀득했다. 아까 고삼차 먹을 때 주지.

주방의 사 면 중, 마지막 한쪽을 채우고 있는 것은 거대한 냉장고 세 대였다. 와우. 한 대는 냉동고, 한 대는 냉장고, 한 대는 김치냉장고였다. 김치냉장고엔 웃기게도 김치가 있었다. 커피숍 웬 김치가. 하고 생각했다가 아. 여기 약방이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더구나 안채는 은미 씨의 집이기도 하니까 김치가 있는 것은 당연했다. 냉동고에는 얼려둔 과일과 곶감, 약과 등이 거의 대부분이었고, 맨 아래 칸에 생선과 고기 등 반찬용 식품들이 조금 있었다. 냉장고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해동 중이라는 약과와 곶감, 온갖 말린 과일들과 견과류 등이 작은 바구니에 담겨 들어 있었고, 반찬으로 보이는 음식은 작고 납작한 통 몇 개가 전부였다. 김치냉장고는 김치가 담긴 붉은 통 하나 빼고는 죄다 과일이었다. 이 많은 과일을 누가 다 먹는 걸까. 손님이 그만큼 많지도 않을 것 같은데. 내가 김치냉장고의 문을 닫으려는 순간, 손 하나가 쑥 들어왔다 사라졌다. 너무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은미 씨가 어느샌가 사과 하나를 쥐고 있었다. 아. 사장님이 다 드시는구만. 내가 씩 웃자 그녀는 사과를 아주 쉽게 반으로 쪼개어, 반쪽을 내게 내밀었다.


“제가 과일을 좋아해서요.”


“저도 과일 좋아합니다.”


아니요. 실은 별로 안 좋아합니다. 배 빨리 꺼지고 달아서요.


“정말요? 잘 됐다! 과일은 마음껏 드셔도 돼요! 드시고 싶으신 만큼 드시고 퇴근하실 때 가지고 가셔도 돼요!”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과일값 비쌀 텐데. 하긴. 가만히 앉아서 수 백, 수 천 뜯어내는 사기꾼에게 과일값이 뭔 대수일까. 뭐 조금만 사바사바하면 최고급 과일들이 박스째 줄지어 들어올 텐데. 나는 사과를 덥석 물었다. 음. 맛은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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