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방 호은당

<에피소드 2- 벌레에 물린 아기(E)>

by 혜니




도자기와 유리 파편들을 싹 치우고 행주 세 장을 버렸다. 솜 방석도 결국은 버려야 했다. 은미 씨는 솜 많아서 좋은데. 하며 아쉬워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새 것을 구입할 것을 권했다. 돈도 많으면서 뭔 걱정이야. 아침에 왔던 그 아줌마한테 몇 천 받았을 거 아닌가. 그 아줌마가 곧 또 돈다발 들고 오겠지. 그깟 방석 얼마 한다고.

아기와 아기 엄마가 가고 나자 상담을 하고 나니 허기가 진다며 은미 씨는 주방을 기웃거렸다.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그녀가 달라는 대로 고분고분 떡과 약과를 접시에 담았다. 나는 충실한 돌쇠니까. 시원한 커피까지 한 잔씩 챙겨 들고 나와 은미 씨는 정원 가운데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다 움찔했다. 아직 녹음이 되고 있었다. 얼른 저장 버튼을 눌렀다. 재빨리 녹음 어플을 꺼버리고 쇼핑몰을 켰다. 누빔 방석, 대나무 방석, 솜 방석, 자수 방석부터 빈 백, 좌식 의자, 소파베드까지 목록이 좌라락 펼쳐졌다. 나는 그중에서 원래 쓰던 것과 가장 비슷해 보이는 붉은 갈색 자수 방석을 찾아 내밀었다. 은미 씨는 약과를 맛있게 먹다 기름 묻은 손을 앞치마에 슥슥 닦고는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 방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미간이 찌푸려졌다.


“정우 씨 취향이... 고풍스럽네요.”


촌스럽다는 말을 그렇게도 쓸 수 있구나. 내 취향이 아니라 댁이 쓰던 방석이랑 제일 비슷한 건데요. 댁 취향이 고풍스러운 거 아닙니까. 쳇.

은미 씨는 약과를 오물거리며 또 열심히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아까 입간판도 안 골랐는데. 약과... 맛있나? 나는 오물오물 움직이는 발그스름한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다 약과 하나를 집어 들었다. 뭐... 내가 아는 그 약과 맛이긴 하다. 뭔가 좀 더 특별한 맛이 아닐까 조금 기대했었지만, 평범한 그 맛이었다.

은미 씨의 코톡으로 입간판과 방석 판매 사이트의 링크를 보내 놓고 텅 빈 마당으로 시선을 돌렸다. 첫날, 신고식 화려하게 치른 기분이다. 출근하기가 무섭게 입간판을 박살 내며 들어온 부잣집 마나님, 햇살 노곤한 오후에 찾아온 가여운 아기. 거기다 먹성 좋은 은미 씨의 점심과 간식을 챙겨 주다 보니 어느새 오늘도 절반이 훌쩍 넘어간 뒤였다. 평범한 커피 한 잔을 들고 조용히 앉아 이렇게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네. 어색하고 불편했던 공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고용주인 은미 씨가 내 앞에 있음에도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일하러 왔다기보다는 찻집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신기하네.


은미 씨는 입간판과 방석 주문을 끝내고 약을 만들어야 한다며 분주히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충실한 돌쇠로써 주인마님의 심부름을 열심히 했다. 사극에서나 볼 법한 돌로 된 조제도구들이 해골 방에서 계속 나왔다. 나는 눈을 꼭 감고 은미 씨가 꺼내 주는 것들을 받아 들었다. 묵직한 도구들을 상담실에 가져다 놓고, 은미 씨를 따라 건넛방과 주방, 해골 방을 돌면서 약재들을 챙겼다. 대부분 손질이 다 된 재료들이었는데, 섞거나 달이거나 빚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럼 저 무거운 것들은 뭐할 때 쓰려고 꺼낸 거지? 궁금해하던 찰나, 은미 씨는 손에 들고 있던 거무튀튀한 봉지를 주욱 뜯고, 속에 든 무언가를 돌절구에 주르르 쏟아부었다. 아. 갈아야 하는구나. 나는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인 줄 알았다. 작은 크기이긴 하나, 절굿공이도 돌이었고 양도 꽤 많아 보였다. 꺼내놓은 약재들을 보아하니, 많은 일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아, 그냥 두세요. 제가 하면 돼요. 그냥 두시고 밖에서 쉬세요.”


은미 씨는 얼른 내 손에서 절굿공이를 빼앗더니 나를 내보냈다. 양 엄청 많을 것 같은데. 혼자 다 어떻게 하려고 저러지? 내가 도와주겠다고 몇 번을 이야기해도 은미 씨는 그저 괜찮다며 웃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이라면서 말이다. 그래. 뭐. 약을 부수든 짓이기든. 약을 만드는 건 약사가 하는 거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 나오다가 상담실 입구 옆의 책장을 보았다.


“저, 은미 씨. 이 책, 봐도 되나요?”


표지에는 멋들어진 청자 그림이 있었지만, 분명 제목은 「전통 차 제대로 우리기」였다. 제법 두툼한 책을 빼들고 표지를 보여주었다. 은미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약방의 차들도 거기 대부분 나와 있으니 읽어보시면 도움될 거예요.”


은미 씨는 필요하다면 가지고 다니면서 읽어도 좋다고 했다. 두께도 상당했는데 출퇴근할 때 지하철에서 읽기 딱 좋았다. 나는 책을 챙겨 들고 대청마루로 나왔다. 문을 닫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콩콩콩. 돌절구 찧는 소리가 들려왔다. 힘들 텐데. 나더러 하라고 시켜도 아마 나는 군소리 없이 했을 것이다. 뭐, 본인이 하겠다는데.

마당으로 내려서며 운동화를 구겨 신었다. 내일은 슬리퍼라도 사 와야지. 아, 슬리퍼 신어도 되겠지? 마트에 파는 까만 줄 세 개 그어진 그 슬리퍼가 최곤데. 얼음이 반 쯤 녹아버린 커피를 앞에 두고 나는 책을 펼쳤다.

아이고야. 까만 건 글씨고 하얀 건 종이구나. 빼곡하게 채워진 깨알 같은 글씨들을 찬찬히 읽으며 조금 전 내가 끓였던 수국차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여기 있다. 그림 한 장 없는 글자의 바다를 허우적거리며 내가 끓였던 그 차의 맛과 향, 효능에 대해 읽어보았다.

아기와 엄마가 가고 나서, 다구를 치우며 맛을 슬쩍 보았었다. 얼마나 아릿하게 달던지. 기절할 뻔했다. 색깔도 탁하고 맛도 더럽게 없었다. 물엿과 박하사탕 가루를 섞은 것 같은 맛이었는데 책에는 달큰하고 시원한 향이 난다고 한다. 그 낭낭한 단 맛을 달큰하다고 표현하나? 박하사탕 가루만 타 넣은 것 같은 애매한 향을 시원하다고 하나? 도대체 무슨 맛을 표현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 많이 우러나서 그런 걸까.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책에 나온 대로 우려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나는 다시 책을 파라락 넘겨 첫 페이지부터 훑기 시작했다. 목차에 나열된 이백오십 가지의 차를 주욱 읽다 보니 졸음이 쏟아졌다. 따뜻한 봄 햇살이 비치는 마당 한가운데, 얼음 다 녹은 커피를 앞에 두고 나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내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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