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5-죽음을 피하고 싶은 마음(2)>
콩나물국을 두 그릇이나 깨끗이 비워내고 나니 은미 씨의 몰골이 조금은 나아 보였다. 시커멓던 눈 밑도, 푸석푸석하던 볼도 이제는 핏기가 어렴풋이 돌고 있었다. 은미 씨는 연화 선녀와 뭘 하고 놀았는지 시시콜콜 떠들었다. 대단하다, 정말. 아침부터 새벽까지 내내 밖에서만 놀았단다.
헌팅 포차인지 뭔지 하는 곳에서 술을 마시다가 괴물 같은 남자가 자꾸 추근거려 도망치듯 나오고, 클럽에서는 비실비실하게 마른 남자가 추근거려서 나오고, 포장마차에서는 술 취한 아저씨가 작업을 걸어서 도망치고, 선술집에서는 양아치 같은 놈들이 추파를 던져서 도망을 쳤단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 자꾸만 방해를 하고 시비를 걸고 추파를 던져서 여기저기 헤매며 먹다 보니 늦게까지 놀게 됐다는데, 그게 지금 변명입니까? 남자 꼬이는 게 싫으면 헌팅 포차를 안 가야지. 클럽을 안 가야지. 그게 그렇게 싫으면 밤에 안 다녀야지!
옷은 뭐 입고 나갔냐고 물을 뻔했다. 연화 선녀처럼 요란하게 차려입고 다닌 건 아니겠지? 웬 남자들이 득실득실 꼬여들어 은미 씨를 귀찮게 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화가 치밀었다.
아니, 질투가 아니다. 어디 감히 내 동생을! 혹은 어디 감히 내 딸을! 그래. 그런 기분이었다. 질투가 아니라 남자들이 미웠다. 괘씸했다. 어디 감히.
은미 씨는 소금과 핫소스를 넣은 토마토 주스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내 눈치를 살폈다. 인터넷에서 보니, 해장 음료로 좋다고 하길래 만들어 주었는데, 맛은 의외로 괜찮았다.
“그래도 저, 아무에게도 연락처 주거나 명함 주거나 안 그랬어요. 이름도 안 가르쳐줬어요.”
아, 예. 그러세요. 장하십니다. 아주 잘하셨어요. 은미 씨는 내 표정을 보고 깔깔 웃었다.
“아, 진짜. 정우 씨, 영화에 나오는 그 아빠 같아요. 딸 구한다고 악당 소굴로 쳐들어간 그 아빠요. 너무 웃겨!”
웃겨요? 웃겨? 어제 큰일 날 뻔했다는 걸 왜 몰라요? 그 놈들 중에 누구 하나라도 나쁜 마음먹었으면, 여자 둘이서 어떻게 하려고요?
“다음부터 늦게까지 놀 계획이시면, 다 놀고 저 부르세요. 중간에 귀찮은 일 생기면 부르시고요.”
“어... 왜요?”
은미 씨는 눈을 끔뻑거리며 토마토 주스를 호로록 비웠다. 와. 밥 그만큼 먹고도 그게 또 들어가나. 진짜 신기한 위장이다. 너튜브로 먹방 찍으면 인기 터지겠다.
“왜는 무슨 왜예요? 위험하니까 그렇지. 술 먹고 운전 한 건 아니죠?”
나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강조했다. 위험하다고. 요즘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데. 벌건 대낮에도 이유 없이 사람 찔러 죽이는데. 아저씨긴 하지만 나라도 있으면 좀 덜 하겠지.
“차는 두고 나갔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음주운전은 안 해요.”
은미 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래. 음주운전은 하면 안 되지. 차라리 날 불러서 대리를 시켜. 그게 나으니까. 이건 뭐, 직원인지 보호잔지. 보면 볼수록 물가에 애를 내놓은 기분이다. 밥 챙겨줘서 그런가. 노비라서 그런가. 보면 볼수록 애 같고 어려서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여자? 턱도 없지. 애다, 애.
나는 빈 컵을 들고일어나며 은미 씨를 방으로 밀어 넣었다. 좀 더 자야 할 것 같았다. 눈에서 졸음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좀 자요. 혼자서도 이젠 그럭저럭 하니까. 약방 손님 오면 깨울게요.”
은미 씨는 고맙다는 대답만 남기고 기다렸다는 듯 방으로 쏙 들어갔다. 허허허. 웃음밖에 안 나온다. 나는 컵을 씻어 두고 이제 페이지가 얼마 남지 않은 차 우리기 책을 들고 나와 대청에 앉았다. 책은 꽤 재미있었다. 읽고 있으면 시간도 잘 갔다.
주문한 입간판이 제작 실수로 재작업에 들어가는 바람에, 아직도 입간판은 없었지만 단골들은 꾸준히 찾아왔다. 대문만 열어 두면 단골이 아닌 손님도 가끔은 들어왔다. 나는 열린 대문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잠시 바라보다 책으로 눈을 돌렸다. 봄바람이 포근했다. 미세먼지만 없으면 좋겠는데. 코가 따끔했다. 내일은 마스크라도 가지고 와야 할 것 같았다.
얼마나 책에 빠져 있었던 걸까. 나는 내 앞으로 다가오는 그림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눈이 퉁퉁 부은 중년 여인과 그 부인을 부축하듯 안고 있는 중년 남자가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아, 어, 어서 오세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희가 조심스럽게 들어오느라... 여기가 약방이 맞는지요?”
중년 남자의 목소리만 들어도 얼마나 큰 수심에 잠겨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옆에서 훌쩍이고 있는 여인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가까운 곳의 의자를 당겨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예, 약방 맞습니다. 지금...”
“선생님, 저희 아들 좀 살려주세요!”
약방이 맞단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축 처져있던 부인이 눈을 번뜩이며 내 손을 꽉 잡았다. 나는 당황해서 얼른 손을 빼려고 했지만, 어디서 나온 힘인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 저, 아니, 잠시만요.”
“우리 아들, 우리 민이 좀 살려주세요! 제발 좀 살려주세요!”
내 말은 전혀 듣지도 않고, 부부는 다짜고짜 매달려 빌기 시작했다. 나는 꽉 잡힌 손을 빼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아니, 그러니까 저는 약사가 아니라요! 좀 놔 봐요, 좀!”
“우리 민이 좀 살려주세요!”
아니, 그 민이가 댁네 자식인 건 알겠는데, 좀. 놔 봐요. 약사 불러 올 테니까! 무슨, 황소라도 잡아먹었나. 힘이 뭐 이렇게 세? 나는 힘겹게 손을 떼어내고 두어 걸음 물러섰다. 중년 여자는 손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어버리고 남자 또한 눈물을 글썽이며 부인의 어깨를 도닥거렸다.
“우리 민이가... 민이가 열아홉 해를 못 넘긴대요. 여기 약사님이라면 해결 방법을 알지도 모른다고 연화 선녀님이 알려주셔서...”
그럼 그렇지. 또 연화 선녀다. 내 이 사기꾼을 그냥...! 어? 근데, 뭐? 죽는다는 건가? 열아홉 살이 되면 죽는다고? 그걸 은미 씨보고 해결하라고? 이건 좀 아니잖아, 이 무당아!